▲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주어진 숙제는 바로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현대인은 `우리`에서`나`를 중심으로 각자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것도 정신보다는 육체의 `나`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나의 육체를 영위해가기 위한 물질적 요소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되었다. 내 삶은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 결정되어 버린다. 즉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물질이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 삶을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물질을 누리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모든 의식이 집중되어 있다.

삶의 철학은 곧 삶의 기예를 가리킨다. 진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을 행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표준 정의는 대체로 이렇다.`삶의 철학은 지혜의 통찰이다. 지혜란 삶의 기술을 가리킨다. 목표는 행복이다. 쾌락이 아니라 덕성이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 것이다.` 오랜 세월을 인문과 삶의 철학의 중심이 되었던 유학(儒學)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쇠락하고 있다. 혹시나 지탱하고 있다하여도 그 참정신이 소멸된 껍데기뿐이다. 중국의 학자 모종삼(1909~1995) 교수는 중국 역시 명말청조 고증학이 `지식을 위한 지식`으로 낙착되면서 중국인의 삶의 철학정신이 죽었다고 탄식하였다.

개개인에게서 진정한 삶의 목표가 실종된 결과는 우리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삶속에서 발생되는 스트레스가 내면세계의 분노조절장애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며칠 전 Y대학에서 대학원생으로 인해 발생한 텀블러형 사제폭탄 사고도 이런 현상의 사례이다. 지도교수의 폭언과 논문 작성과정에서 마찰에 불만을 품고 폭탄 테러를 결심했다고 한다. 대학에서의 교수 갑질이 학생들의 인권을 심하게 침해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이 대학뿐만 아니고 거의 모든 대학에서 폭언이나 부당한 개인의 업무지시, 학생 인건비착취 등 인권침해가 뉴스로 보도된 지 오래다. 그들은 대체로 변화에 소극적이기 때문에 담당자들이 발상의 전환을 하기가 쉽지 않다. 본인의 의도나 심술의 선악과는 별개로 교육의 본질과 전인(全人)으로서의 나를 잊고 물질에 물든 기존의 관행에 익숙해서 생기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살인이나 아동학대 같은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사람 목숨을 경시하는 끔직한 흉악범죄를 비롯해 묵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범죄 역시 참된 삶의 방향을 잃고 분노나 충동을 통제하지 못해 일어나는 사례다.

물질이 설쳐대는 오늘날에는 이인(里仁)의 공동체 즉 대동(大同)의 꿈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 복잡한 사회와 커진 경제 규모, 기대 수준에 맞추어 일과 삶을 조화시키고 직업의 질을 고민하게 되었으며 일상적 권력과 불평등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인권 또한 시급해졌다. `우리의 공동체는 건전한가!` 이 물음의 답을 찾아서 실현함으로써 미래의 우리사회는 건강해질 수 있다.

그 답은 바로 `인의예지`가 새 공동체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에 던져진 화두의 인은 공감과 소통의 능력이며 무고한 자를 다쳐 이익을 도모하지 않겠다는 휴머니티이다. 의는 자신의 이기심과 이해관계를 유보하고 사회적 공정성을 향한 의지이다. 예는 의가 해결하지 못하는 일상의 공간에서 부드럽게 작동하는 인간관계의 중심 태도이다. 지와 배려와 관용은 이 덕목들을 배양하는 교육과 훈련에 해당한다. 이 지식들은 태어나면서 저절로 아는 것도 아니고 지식만으로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각자 사려와 선택에서 이 지식들이 실질적 힘을 지혜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부단히 연습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