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의 지적 능력과 생각에 따라 이루어지고 사라지게 된다. 인간의 능력은 타고 나는 것인가, 후천적으로 개발되어 지는 것인가. 천품 즉 천성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 운명과 숙명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난 이생에서 운명은 바꿀 수 있어도 숙명은 다음 생에나 가능하다는 말을 보면 참 무서운 것이 사람이 가지는 타고나는 함량이다.

장자도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수명이 짧은 것은 수명이 긴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하루살이는 새벽과 밤을 모르고 스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라고 했다.

타고남과 후천적 성장,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혁명이 모든 것들 중 어디까지 나의 영역일까. 깊은 생각과 회한에 젖는다.

우리 모두 자식들에게 남을 달 수 있는 저울이 아닌, 담을 수 있는 넉넉한 그릇의 크기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일이 부모로서의 책무이다. 유교적 가풍속이 아니어도 집안을 따져보고 혼사를 치름도 틀린 일은 아닌듯 하다. 세상이 각박하고 무섭고 치 떨리는 일이 매스컴의 첫 소식이다. 텔레비전 켜기가 무섭고 두렵다. 그래도 세상은 따스하고 살 만한 곳이라고 위로한다.

도량이 넓은 사람은 탐하고 닮고 싶지만 크기만 큰 차디찬 가옥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집의 크기와 누추함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집에 누가 살고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권력과 명예가 아니라 능력과 인간 됨됨이다. 즉 인품과 인격이다.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의 인품 없는 행위에 참 슬픈 일이라고 느낄 때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전시장에서 하루종일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과 행동에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다. 많이 배운다. “잘못을 아는 그 자리가 깨치는 자리”라는 위대하고 매서운 그 말이 오래 남는다. 그들이 모두 나의 스승이다.

살면서 나 자신도 나의 공부의 질과 양이 어디쯤일까, 생각하게 된다. 양보다는 질이라 하면서도 내가 가진 짧은 마음의 줄자로 남을 재어 보기도 하였고 나의 작은 그릇에 넘치는 사람도 가차없이 비난해 보았고 나의 저울에 달수도 없는 넘치는 사람들도 가차없이 비난해 보았다. 내가 몰라 부끄러워 남의 작품 앞에 이상하다, 모르겠다라고 했던 그 옛 기억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반성하고 용서바라며 참회한다.

이런 나의 마음의 그릇 크기는 한 되나 될까. 행동보다 말이 숱하게 앞섰고 하지 말아야지, 하는 일이 또다시 일어나는 것 나의 그릇이 “한말 두되”나 되면 얼마나 좋을까. 남에게 줄 때는 되를 깎았고 받을 때는 고봉으로 받고 싶었던 못난 마음도 이제 내려놓아야 할 나이도 되었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지지만 지금도 늦지 않다.

“큰 세계가 생각에 따라 작게 크게 변한다”는 화엄경의 글귀따라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몇 되의 마음의 그릇을 한번 내어 말려보면 좋겠다.

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