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들이 `우주 제일의 책`이라 칭송하는 논어는 공자의 언행(기원전 552-479)을 기록한 책이다. 에는 논의와 語에는 말에 대한 답이라는 뜻이 있다. 정확히 편집한 제자들은 문하생인 증자나 유자라는 학통의 계승자라는 설이 있다. 전편적인 내용은 인생의 모든 면과 가르침은 타당하고 간결하면서 설득력이 넘치는 직관적 사고의 서술이다. 논어의 사상은 仁이며 “인을 행하는 사람은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인이라 하고, 정치하는 이는 국가를 이롭게하는 것을 인이라 한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사상적 측면에서는 천명론으로서 하늘을 신봉했고 학습과 사유에서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강조하였다. 또한 인격의 완성자로서의 군자는 인, 의, 예, 지, 용을 강조하였고 효제와 충서도 인의 중요한 실천 덕목으로 정리
세상이 요지경이다. 지견없는 몇 사람의 과오로 세상이 참 우스워졌다. 슬픈 일이다. 국민 모두가 복이 없는것인지 대한민국이 복이 없는지 사람들의 얼굴이 편치 않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누구 탓 하기보다 한 번 더 자신을 돌이켜 볼 일이다. 개개인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면 도덕적 잣대보다 너무 큰 이익, 즉 사리사욕을 안겨주게 된 것 같다. 이익 앞에는 성인도 어쩔 수 없다고 하였던가. “덕행과 사업은 자신보다 나은 이를 본받는 것이고 명예나 지위는 자신보다 못한 이를 살피는 일이다”라는 최근 가졌던 필자의 전시회 글귀가 생생하다. 제나라 때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그림으로써는 사람의 생각을 다 그려낼 수 없고 글로써는 사람의 생각을 다 적을 수 없다. 그렇지만 몇 줄의 시로써는 흉중에 드러내고자 하는 숨어있는 마음까지 다 감추어 드러낼 수 있다. 논어에서는 시(詩)에 대해 간절히 소상히 제자들에게 일러주고 자상히 시를 배우는 것에 대해 간절히 권고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산문, 수필, 시 중에 시가 아닌 사서의 시경(詩經)을 이야기하며 시경은 시와는 조금은 차원이 다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경은 인륜의 도와 세속의 모든 것들을 설하고 있는 고전이다. 연민, 도덕 등 흥미로운 시대의 풍자이며 BC 12세기 서주에서 춘추 초기까지의 중국 노래 가사집으로 총 305편이다. 공자께서는 시경을 한마디로 “생각에 삿됨이 없는 것” 즉 사무사(思
논어 계씨(季氏)편에 공자가 “이로운 벗이 셋, 손해되는 벗이 셋이다. 곧은 벗과 미더운 벗과 지식이 많은 벗은 이롭고 편벽된 벗과 비위를 잘 맞추는 벗과 말만 잘하는 벗은 손해가 된다”라고 말했다. 살아가면서 숱한 친구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살아간다. 삶의 길목에서 만나는 그 사람들 중에서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것도 지고지순한 억겁의 인연이 아닐 수 없으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쉽게 쓰여진다. `벗이 곧 새로운 나`라는 것으로 인식하면 벗은 참 귀한 존재감이다. 벗이 곧으면 자기의 허물을 들을 수 있고 벗이 미더우면 나도 성실한데 나아갈 수 있으며 벗이 지식이 많으면 나도 덩달아 밝아질 수 있다. 귀하고 외경스러운 벗은 만날 수만 있다면 그지 없는 최상의 복이다. 벗은 내가 어질게
선한 것은 무엇이며 악한 것은 무엇일까. “좀 더 선하게 살고 싶다.” 흔히 이런 어려운 말들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선도 아닌 악도 아닌 그 이전에 “너는 누구인가.” 이는 선종에서의 커다란 가르침의 화두이다. 가끔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은 참 선한 사람이다”라고 듣기만 해도 생각이 정제되고 청소되는 것 같다. “선하다”라는 한 마디가 내 생각의 강력청결 청소제인 것이다. 논어 이인편에 공자께서는 “어진 사람을 보면 자기도 그와 같아야겠다고 생각해야 하며 어질지 않은 사람을 보면 자기도 그렇지 않은가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했다. 어진 사람과 똑같아지기를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도 그러한 선함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요, 안으로 반성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악이 있을까 두려워 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했
공자의 3천여 명의 제자 중에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명인 자공은 재산을 모으는데 남다른 탁월함이 있었다. 그와는 다르게 묵묵히 스승의 뒤를 따르는 안회는 매우 가난했으나 아성(亞聖)으로 축앙되며 인(仁)에 대한 제 일인자로 인정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토론식 수업 방법이다. 질문은 제자들의 능력과 창조의 힘을 심어주고 일깨워내는 탁월한 방법이다. 자상하고 친절한 노파의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좋은 가르침이 아니다. 길을 제시하고 생각의 크기를 열어주는 것이 최상의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나를, 뛰어넘는 자를 길러낼 수 없다면 정녕 그것은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단언하고 싶다. 내 자신도 이 부분에서 할 말이 없다 내가 아는 것이 부족하기에 그들에게 새 길을 열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
“지금의 그 자리가 당신의 자리인가요?” 살다 보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많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자신의 능력 밖의 행위를 하고 있음을 느낄 때나 남이 하고 있는 모순된 상황도 또한 그러하다. 가끔씩 행사장에 나가보면 더더욱 자리와 명예, 권력, 감투 이러한 허망한 일이 사람들을 착각하게 만들어 놓는 경우를 접하면 참으로 허망하고 마음이 편치않다. 이 또한 세상살이의 흐름이겠지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공자께서도 요왈편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명(命)을 알려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질서의식)를 모르면 사회에 나아갈 수 없고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선과 악도 구분할 수도 없고 사람의 됨됨이도 알수가 없다”하셨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살다 보면 반드시 일어날 일은 일어나
논어를 흔히 천하제일의 책이라 하고 “최상지극우주제일(最上至極宇宙第一)의 책”이라고 한다. 읽을수록 알듯하면서도 좀체 가늠할 수 없는 그 깊이를 가지고 있다. 여름에 읽는 논어와 겨울에 읽는 논어의 깊이가 다르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일까. 맹자는 여름에 읽으면 속이 시원해지고 논어는 겨울에 읽으면 따뜻해지고 대학과 중용은 아침에 읽으면 맑아진다고 하니 참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공자께서도 학문에 대한 즐거움을 이렇게 정의하셨다. “즐거움도 근심도 잊어 자신이 늙어감을 모른다”라고. 즐거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살면서 가식없이 기쁘고 슬플 때도 있겠지만 기쁨, 슬픔, 근심, 희망도 모두가 작위에 의한 마음의 조작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이른 새벽이 편치않다. 사람의 생이란 기쁨이 한 말이며 슬픔과 근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의 지적 능력과 생각에 따라 이루어지고 사라지게 된다. 인간의 능력은 타고 나는 것인가, 후천적으로 개발되어 지는 것인가. 천품 즉 천성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 운명과 숙명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난 이생에서 운명은 바꿀 수 있어도 숙명은 다음 생에나 가능하다는 말을 보면 참 무서운 것이 사람이 가지는 타고나는 함량이다. 장자도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수명이 짧은 것은 수명이 긴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하루살이는 새벽과 밤을 모르고 스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라고 했다. 타고남과 후천적 성장,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혁명이 모든 것들 중 어디까지 나의 영역일까. 깊은 생각과 회한에 젖는다. 우리 모두 자식들에게 남을 달 수 있는 저울이 아닌, 담을 수
도는 어떤 것입니까? 울타리밖에 있지. 그 道말고요. 그럼 무슨 道. 大道 말입니다. 大道라면 장안가는 길이 있지. 어느 스님과 조주와의 선문답이 조주록에 실려 있다. 한번 크게 웃어볼 일이다. 공자께서도 태백편에 군자가 향해 가야할 도는 3가지가 있는데 나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지혜있는 사람은 갈피를 못 잡는 일이 없고 용기있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공은 이것은 선생님만이 할 수 있다 하였다. 어찌 이것만이 도일까. 도는 여러 가지로 서도, 다도, 검도, 예도 모든 삶의 길, 실생활이 바로 도의 수행이며 길인 것이다. 도를 道로 표현하면 어렵지만`길`로 해석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불가에서는 득도의 도를 평상심이라고 하고 남천께서는 “도는 知에도 속하지 않고
시경은 고대부터 전해오는 3천여 편의 시 중에서 305편을 뽑아 편찬한 것이다. 공자께서는 시경의 시 305편을 다 읽으면 생각이 사악한 마음, 즉 사특함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내 자신은 논어를 읽으면서 사무사(思無邪)에 대한 여러 해설집을 읽었지만 무엇이라고 정의하기가 쉽지 않았다. 언젠가 전각 작품으로 새긴 기억이 있지만 내용상의 깊은 정리는 솔직히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였다. 먼저 邪라는 글자의 어원에서 힘들었다. 옛 글귀에 邪는 正을 이길 수 없다고 하였으며 邪는 본래 땅의 형상을 나타내는 의미로서 바르지 않다, 기우뚱하다의 뜻으로 접근할 수 있어 대략적인데까지 이를 수 있었다. 즉 시는 시대적 해석으로 간사하고 바르지 않고 정직하지 않은 것 등으로 正道가 아닌 邪道가 되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 양화
논어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무엇보다 회자되는 공자의 사상은 충(忠)과 서(恕)라고 할 수 있다. 춘추 좌씨전에서 충은 속마음을 다하는 것(中心)이며 서는 같은 마음(如心)이며 동감, 공감, 동심으로 풀이하였다. 논어 이인(里仁)편 제15장에서는 이렇게 서술되고 있다.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하니 증자가 말하길 “예”라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지인이 묻기를 “무슨말입니까” 하자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 일 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자의 가장 큰 사람인 인(仁)의 다른 표현이 충과 서이다. 충은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서는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남을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충은 자신의 참된 마음을 다하는 진력의 정신이며 내몸과 마음 전부로 혼연히 바치는 것이며 서는 내가 하
잘살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깊이 탐구하고 몰입하면 정녕 자신의 능력과 한계만큼의 답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글씨를 쓰고 살면서 언젠가 잘쓰고 싶은 단계가 지나면 사람은 스스로 착해지고 너그러워지며 천진난만한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히 내 자신도 법속에 매이지 않고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 신의 경지와 묘한 이치와 형상에 이를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잘살고 행복하기 위해 누구나 열심히 살아간다. 행복은 자신보다 남들과의 공감지수도 포함되고 사랑이라는 대명제가 실천될 때 훨씬 더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나서는 몰입이야말로 완전 행복이라는 다른 표현이다. 자장이 공자에게 숱하게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는 넌지시 능히 다섯 가지를 행할 수 있다면 仁할 수 있다. 자장
가끔씩 저녁도 같이 나누고 만남 자체가 공부가 되는 지인이 얼마전 아침 일찍 카톡으로 서울에 인문학 강의를 듣기 위해 왔다면서 강의장의 모습을 보내 왔다. 끊임없이 갈망하고 진리를 찾아나서는 구도와 구학열에 내 자신이 사뭇 부끄러웠다. 학문이란 무엇일까? 배운다는 것은 용기이고 희망이며 삶의 지탱제이며 힘이다. 공자는 “배우기를 널리하고 뜻을 독실히 행하라. 깊이 묻고 가까운 것부터 생각하면 인덕이 그 안에 있다(박학독지·博學篤志)” 하셨다. 박(博)이라는 한자는 시방(十方) 즉 사방에 부는 논에 모를 넓게 심다의 의미로 새길 수 있다. 공부는 폭넓고 깊으며 반드시 자신의 행동이 지식으로부터 자유로움의 단계에 들 수가 있다. 독(篤)은 목표라는 지점을 두고 천천히 걷다보면 도달할 수 있다. 즉 말이 천천
오랫동안 같이 공부하는 도반이 중학생 아들방에 작품을 한 점 걸어주고 싶다고 했다. 논어를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면서 자식의 결점을 보완해 주려는 깊은 배려인 것 같았다. 작품의 내용은 `눌언민행`을 선택해 왔었다. 선택의 의미는 깊고 신중하고 소중했었다. 논어의 글귀가 평생 아들 생각의 본(本)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나도 덩달아 기뻤다. 눌언은 말은 좀 더듬어도 괜찮고 민행 즉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는 표피적인 해석보다 숨어있는 그 깊이와 두께는 천근만근이고 말이나 글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관념적 사유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말보다는 행동의 중요성이다. 자공이 물었을 때 군자는 “말보다는 실천이 앞서는 자”라고 정의했다. 거듭 군자는 자신의 말이 행동보다 앞서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누차 강조하셨다. 말은
공자께서는 “굳세고 꿋꿋하며 질박하면서도 말이 적으면 인(仁)에 가깝다”하셨다. `강의목눌(剛毅木訥), 이 네 글자 중 글자 한 자만 하더라도 교과서 100권의 무게보다 더 무겁고 뜻깊은 글자이다. 매년 초에 공부하면서 한 글자를 정해서 일년이라는 세월을 지키려고 다짐하는 글자 중에서 의(毅)와 눌(訥)은 벌써부터 선택해 본 글자이다. `꿋꿋하고 굳세다`라는 의미의 의(毅)는 바늘에 찔린 멧돼지가 털을 곧추세우며 성내는 의미의 글자적 의미도 있다. 정의가 아님에 대한 감정의 표출과 용납할 수 없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리고 눌(訥)이라는 글자는 사람의 입의 말이 어디에 갇혀져 있는 형상에서 왔다. 다시말해 말은 깊은 곳에서 빼내와야지 세치 혀 끝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옛말에 “소에게 한 말은 지켜져도 사람
논어 위정 편에 “북극성을 중심으로 은하계가 줄지어지듯 사람들이 덕있는 사람쪽으로 몰려들기 마련이다”고 했다. 공자께서는 덕을 높이려면 “남을 대할 때 성실과 신의를 지키고 정의를 지향하면 도덕의식이 높아진다”라고 안연 편에 말씀하셨다. 정치의 요체는 오로지 바로잡는 일이기에 정(政)은 정(正)의 의미이며 바르게 되라고 채찍질하는 것이다. 정치와 도덕은 하나이며 곧은 도덕을 행하는 것이며 도덕의 참된 실천의 장이 되어야 한다. 공자의 정치는 덕치와 인정이다. 특히 형법의 정치를 반대하고 덕과 예의 정치를 주창하셨다. 또한 위정 편에서 “도덕으로 인도하고 예의로써 통솔한다면 수치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또 바르게 된다”라고 하셨다. 노나라 대부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 “정치란 바로 잡는 것이다. 그대
아침마다 보고 사는 글귀가 있지만 실천에 옮기기가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 “명예와 이익은 성인도 능히 이겨내기 쉽지 않다”라는 장자의 글귀이다. 얼마전 예술단체장 출마를 앞두고 찾아온 친구에게 해준 말이기도 하다. 이겨내기 쉽지 않은 이유는 분명 이익 앞에 의롭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의를 바탕에 두고 예로 행동하고 겸손과 신뢰로서 살아가면 모든 것은 대부분 이루어진다. 의(義)도 예(禮)도 이익(利)도 실천하고 지키기 쉽지 않기에 늘 강조되는 말씀이다. 특히 이익 앞에서의 의로움은 너무 어렵다. 이익 앞에 자유로운 자는 세상에 귀하디 귀하다. 많은 사람들이 잠방이 속에 들어 이익과 향락에 만족하여 다투고 시기하고 모함하다 한 세상을 마친다. 한자의 어원상으로 의(義)는 양(羊)과 아(我)의 구성으로서
지혜와 어짐, 그리고 용기에 대해 자한편에 공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는 의혹하지 않고 어진 자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어 근심하지 아니하고 용맹스러운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셨다. 세상을 산다는 것 곧 사람의 관계속의 문제이다. 큰일을 성공하거나 그릇되거나 모두다 사람의 일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다. 가끔씩 저 사람은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무엇이라고 꼬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같이 있거나 헤어지고 나도 한동안 맑아지는 귀한 경험을 할 때는 말이다.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 무엇일까? 사는 일 일 것이다. 모르기는 해도 살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구하는 일만큼 어려운 것이 천하에 없을 것이다. 마음 자체가 순간에 오만 번 변하기도 하지만 모두가 자기 중심적 행위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작품을 할 때면 글제를 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품의 수준보다 선구(選句)된 내용이 작가의 지견이요, 견처이며 그의 삶의 방향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글씨는 말과 사상과 삶의 철학을 대신해 나타난 형상일 뿐이다. 도록이 오면 글씨는 물론 글제를 찬찬히 세밀히 치밀하게 살펴보고 작업노트에 옮겨 적는 일이 나에게는 너무 익숙하고 귀하고 고마운 일이다. 특히 좋은 글귀는 반복해서 쓰기도 한다. 즉 출품했던 개인전 글제를 다시 다른 방법(장법:구도)으로 작품을 한다. 시간과 공간, 생각의 능력 차이겠지만 성숙하고 다른 작품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 중에 귀하게 여기는 글제 중 하나가 “만약 옥의 티는 갈아내면 사라지는데 잘못된 말 한마디는 돌이킬 수 없다”는 글이다. 벌써 몇 번째 썼고 이번에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