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발의 커트 머리, 새빨간 립스틱이 너무도 잘 어울린 패티 김(72)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뱃속 깊숙이서 끌어올린 기품있는 음색은 세월에 녹슬지 않았고 50여 년 전 히트곡들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패티 김이 9일 밤 서울 충무아트홀 대극장에서 `패션(Passion)-패티김은 열정이다`라는 타이틀로 올해 전국 투어의 막을 올렸다.

공연장 천장에 매달린 간이 무대를 타고 내려온 그는 첫 곡으로 `패션`을 부른 뒤 `와~ 와~`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10~20대만 소리지르라는 법 있습니까. 아직 저는 열정이 넘쳐 흐릅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에요. 특히 여자 팬들, 나이를 생각지 말고 해보고 싶은 걸 도전하세요. 저는 꼭 행글라이더를 탈 겁니다. 남편에게 허락도 받았어요. 하하.”

이날 패티 김은 오른쪽 발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지난달 별세한 작곡가 고(故) 박춘석 씨를 추모하는 방송에 출연했다가 9㎝짜리 힐을 신은 채 다리를 접질린 것이다.

패티김이 화끈거리는 발목 부상을 참고서 더 큰 몸짓, 더 풍성한 소리를 토해내자 그의 모습에 감동한 1천300명의 관객은 하나 둘 적극적인 환호와 박수로 그에게 동화돼 갔다.

그는 노래가 한 곡씩 끝날 때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생큐`로 화답했고, 1~3층 관객들에게 일일이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객석과 `이별`을 합창한 무대에서 관객과의 호흡에 세심하게 신경 쓴 노력이 엿보였다.

이날 패티김은 2008년 50주년 기념 공연 때와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공연장에서 잘 부르지 않았던 30~40년 전 노래 `내 사랑아`, `사랑하는 당신이`, `람디담디담`을 새로이 편곡해 들려줬다.

또 “드라마 `아이리스`의 사탕 키스 모두 한 번씩 해보지 않았느냐”고 운을 떼더니 `아이리스` 삽입곡인 백지영의 `잊지말아요`를 클래식하게 소화했다. 평소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한다며 남성 관객을 위한 넘버로 `모나리자`도 열창했다. 감기때문에 목상태가 좋지않아 고음에서 힘이 달리기도 했지만 관록 있는 가수답게 목소리의 강약을 조절했다.

23년째 호흡을 맞춘 김정택 악단의 반주에 맞춰 흥겹게 달리던 그는 이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가슴 찡한 무대로 이어갔다.

지금의 패티 김을 있게 해준 두 작곡가 박춘석, 고(故) 길옥윤의 히트 넘버를 부른 대목이다.

패티 김이 보름달 속 여신처럼 등장해 절절하게 박춘석의 `초우`를 부르자 패티김이 박춘석과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영상이 LED에 흘러나왔다.

패티 김은 “나의 스승이자 친구, 오빠 같은 분이 돌아가셔서 지금도 슬프다”며 “오래오래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1966-1974년 자신과 부부의 연을 맺었던 길옥윤의 곡 `사랑은 영원히`로 레퍼토리가 이어졌다. 앙코르 무대에서 패티 김은 다시 달렸다. 그는 신발을 벗고 `그대 없이는 못살아`와 `서울의 찬가`를 열창했다.

이날 공연 도중 영상으로 흘러나온 패티 김의 젊은 시절 모습은 섹시하고 세련됐고 예뻤다. 시간이 흘러 그의 모습은 변했지만 열정의 무게는 결코 감량되지 않았다.

유머러스한 입담도 그대로인 그는 “패티 김은 라이브 공연으로 봐야 실력을 알 수 있으니, 이제 중소도시까지 관객들을 많이 찾아가겠다”며 웃었다. 관객 한 사람이 있는 곳까지 구석구석 찾아가겠다는 배려를 담은 말이었다.

패티 김은 11일까지 이곳에서 공연한 뒤 16-17일 고양 아람누리 아람극장, 24일 대구 수상아트피아, 5월1일 마산 3.15아트센터 대극장, 7-8일 수원 경기도문화의 전당, 15일 춘천 강원대학교 백령문화관, 29일 원주 백운아트홀, 6월4-5일 성남아트센터 등지로 공연을 이어간다. 하반기에는 10월 22~23일 세종문화회관 공연이 예정돼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