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진 당시 청량산성·왕모산성·학가산성 등 축조해 전란 대비
공민왕 가족 신격화… 정월대보름 동제 통해 마을 안녕 기원

1. 들어가며-공민왕과 홍건적

2. 공민왕은 왜 안동을 피난처로 택했나

3. 임시수도 70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대항했나

4. 공민왕이 남긴 문화유산

5. 문화유산의 전승방안

고려 31대 공민왕이 안동에 머문 기간은 모두 70일에 불과하다. 우리 역사상 왕의 몽진도 흔치 않았거니와 공민왕의 안동몽진 역시 긴 재위기간에 비하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단 한 번 안동을 찾아 70일을 머문 공민왕. 그러나 그가 남긴 흔적은 이후 안동 지역 사람들의 삶 속에 700년의 세월동안 유·무형으로 남아 이어져 왔다. 이를 크게 나누자면 하사품과 성곽들, 공민왕 신앙, 전통놀이 정도를 들 수 있다.

충성에 보답한 하사품

공민왕은 유형의 문화유산과 무형의 문화유산을 다양하게 남겼다. 유형의 자취 중 대표적인 것들은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안동 지역 백성들의 정성에 감동해 안동부와 안기역에 하사한 물품들이다.

보물 451호로 지정된 이 하사품들은 현재 안동시내의 태사묘의 보물각에 보관중이다.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공민왕은 안동부에 백옥대와 옥관자를 비롯해 모두 18종류 35개 물품을, 안기역에는 유잔구대 14개를 하사했다.

이 가운데 9종 30점이 유실됐고 6종은 일부가 남아있지만 역시 유실된 게 더 많다. 태사묘 보물각에 보관된 하사품들은 따라서 전체 하사품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군왕이면서도 서화에 뛰어난 예술가로 알려진 공민왕은 현판과 포장교서의 형태로 많은 글씨도 하사했다. 현판 글씨로는 영호루(映湖樓)와 안동웅부(安東雄府), 봉정사 진여문(眞如門)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 등이 있다. 포장교서로는 1360년 당시 복주목사이던 정광도에게 내린 것이 태사묘 보물각에 남아있다. 이 교서는 `영가지`에서 안동의 고적 가운데 하나로 꼽은 공민왕 친필교지로 추정되지만 친필 여부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공민왕이 축성했다는 산성들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한 것은 전란을 피해서였다. 이에 따라 안동 지역에는 어찌 보면 필연적이게도 공민왕이 축성했다는 산성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청량산 축용봉 부근의 공민왕산성, 청량사와 여러 절터가 자리 잡은 곳 부근의 청량산성, 오마대도산성(五馬大道山城), 도산면 원천리의 왕모산성(王母山城), 안동과 예천 및 영주의 접경지역인 학가산의 학가산성, 서후면 천등산의 천등산성, 남선면 신석리의 신석산성, 용상동과 성곡동 일대의 성황당토성, 송천동과 임하면 천전리의 경계쯤인 양장성(羊腸城), 일직면 송리의 송리산성, 풍산읍의 풍악산성, 도산면 서부리의 선성산성(宣城山城) 등이다.

이 같은 안동지역의 산성들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도록 이어진 축성방법에 따라 석성 또는 토석혼축의 성으로 모두 공민왕이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성 중 상당수는 공민왕 이전에 있었던 성으로 공민왕이 몽진했을 당시 재정비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이는 원래 안동지역이 전략적 요충지였던 점에 비춰 몽진 이전에 이미 상당수의 산성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도산과 청량산 일대의 경우 왕모산성과 청량산성 등은 물론 공민왕이 군율을 위반한 죄인을 처형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밀성대가 남아 있어 공민왕과의 깊은 인연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학계의 어떤 연구에서도 공민왕이 청량산을 직접 다녀갔다는 사실은 증명되지 않았지만, 산세가 험한 청량산 일대가 매력적인 군사적 요지였던 사실만큼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이 점은 공민왕이 청량산에 직접 다녀갔으며 산성 구축이나 재정비에도 일정부분 관여했을 가능성을 유추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공민왕 신앙

공민왕이 남긴 무형의 문화유산으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신격화 양상이다.

공민왕 또는 왕의 가족을 동신으로 모시는 마을은 현재 안동에만 9개 마을이며 봉화군 지역에도 8개 마을에 이른다. 사실 전통사회에서 특정한 역사적 인물을 공동체의 신으로 모신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공민왕의 신격화 양상은 왕은 물론 왕의 어머니와 부인,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등 가족 구성원 거의를 나눠 신앙화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실제, 공민왕을 직접 모신 마을은 풍산읍 수리 국신당과 남선면 신석리 성골, 용상동 공민왕당이 있다. 또 그의 딸을 모신 `딸당`은 도산면 가송리와 예안면 신남리 구티미마을에 남아 있다. 또 왕의 어머니를 모신 `왕모당`이 도산면 원천리 왕모산성에 존재하며 예안면 신남리 정자골에는 `며느리당`이 남아있다.

600여년 동안 동제가 올려진 가송리 `딸당`에서는 해마다 정월대보름 자정께 많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풍물 등을 앞세우고 길 굿을 벌인 뒤 유교식 제례로 치러진다. 이날 자정을 전후해서는 안동 지역의 공민왕과 가족신을 모신 마을에서는 규모만 다를 뿐 일제히 동제가 열린다. 주민들은 이 동제를 통해 마을의 안녕과 안동 전체가 복을 받기를 기원한다.

놀이와 설화

공민왕의 안동 몽진시 노국공주가 송야천을 건널 때 안동의 부녀자들이 등을 잇대어 인교를 만든데서 유래했다는 `놋다리밟기`는 실은 이전부터 있어온 여성들의 집단놀이라는 데 이설이 별로 없다.

여성들이 서로 손을 잡거나 몸을 부대끼면서 벌이는 집단적 춤이나 놀이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문화임을 춤 인류학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안동의 놋다리밟기는 곤경에 처한 공민왕에 대해 안동 사람들이 얼마나 친절을 베풀었는지에 대한 증거로서 하나의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놋다리밟기는 전라도의 강강술래, 동해안의 월월이청청, 의성의 지애밟기 등과 같은 맥락인 여성의 대동놀이이다. 다만 다른 지역에서의 놀이가 서로 밟고 밟히거나 주고받는 평등한 방식의 놀이라면 안동의 놋다리밟기는 그와 다르다. 공주를 뽑은 뒤 나머지는 모두 엎드리고 공주만이 등을 밟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공민왕 몽진시 노국공주가 이 놀이에 함께 동참하면서 전승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안동에서는 해마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등 수차례 놋다리밟기 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이와 함께 안동 지역에는 공민왕과 관련한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설화는 공민왕이 몽진한 과정을 조명한 이야기기 10편에 달하며, 몽진 기간 동안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는 무려 46편에 달하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공민왕과 그 가족들을 모시는 동제와 관련해서도 42편의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유형별로 살펴보자면 공주를 위해 인교를 놓았다는 놋다리밟기 설화의 경우 공민왕의 몽진과정을 이야기한 대표적인 설화이다. 안동의 여러 지명에 대한 전설과 공민왕이 청량산에서 거주했다는 설화 등은 공민왕이 안동에 머물던 당시의 행적을 소재로 한 설화이다. 이처럼 다양한 설화는 곧 공민왕 신격화의 토대가 됐으며 `공민왕 신앙` 자체도 영험담 등이 전해지는 등 설화로 내려온다.

이처럼 공민왕은 안동 지역에 크고 작은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남겼다. 왕의 안동 체류 이후 7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일부 유실되거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유산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끈질긴 인연은 오늘날까지 안동의 문화적·정신적 모태가 되고 있다.

/정태원·이임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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