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안동` 역사적 가치 부각시킨 `컨텐츠 개발` 절실 본지는 `공민왕과 안동`을 주제로 앞서 4회에 걸쳐 공민왕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안동과의 관계, 유물과 유적 등을 살펴봤다. 공민왕이 안동 지역에 남긴 것은 공민왕가에 대한 신앙으로, 또는 현판 등 필적으로, 더러는 하사한 유물과 이때 쌓았다는 산성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공민왕이 1361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와서 머물렀던 역사적 사건은 이처럼 많은 문화유산을 남기게 했다. 그렇다면 이미 65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공민왕 관련 문화유산(역사의식과 문화현상)을 어떻게 보존하고 전승해야 하는지가 앞으로의 과제다. 유물 등 문화유산의 퇴색 놋다리밟기 등 일부 제외하고 거의 방치 공민
몽진 당시 청량산성·왕모산성·학가산성 등 축조해 전란 대비 공민왕 가족 신격화… 정월대보름 동제 통해 마을 안녕 기원 1. 들어가며-공민왕과 홍건적 2. 공민왕은 왜 안동을 피난처로 택했나 3. 임시수도 70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대항했나 4. 공민왕이 남긴 문화유산 5. 문화유산의 전승방안 고려 31대 공민왕이 안동에 머문 기간은 모두 70일에 불과하다. 우리 역사상 왕의 몽진도 흔치 않았거니와 공민왕의 안동몽진 역시 긴 재위기간에 비하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단 한 번 안동을 찾아 70일을 머문 공민왕. 그러나 그가 남긴 흔적은 이후 안동 지역 사람들의 삶 속에 700년의 세월동안 유·무형으로 남아 이어져 왔다. 이를 크게 나누자면 하사품과 성곽들, 공민왕 신앙, 전통놀
공민왕이 홍건적의 2차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해 머문 기간은 1361년 12월 임진일로부터 1362년 신축일에 이르기까지의 70일 동안이다. 하필 몽진지로 안동을 선택한 것은 날랜 적 기병의 추격을 떨치는데 안동의 산간지형이 유리했고 태조 왕건 이래 보여준 고려왕실에 대한 안동인들의 충성심 등이 작용했음을 전편에서 언급했다. 또 당시 공민왕의 측근 중에는 안동 출신 또는 안동에 연고를 둔 인물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고려왕실을 의리로 지켜낸 안동 사람들은 공민왕의 체류기간 70일 동안 어떻게 왕을 모셨으며 위급한 정세에 대응했을까. 따뜻한 영접과 재기의지 독려 공민왕이 안동에서 70일을 무사하게 보냈다면 이는 안동지역을 관리하는 행정책임자와 지역 백성들의 역할이
공민왕 몽진 당시의 정세 1360년 홍건적은 해로를 거쳐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침입하는 한편 요동 지방에서 활동하던 홍건적의 대부대는 원(元)의 상도를 공격했다. 같은 해 9월 원이 대군을 동원해 만리장성 이남과 이북의 양 방면에서 홍건적을 포위해 압박하자 궁지에 몰린 홍건적은 진로를 고려로 돌렸다. 이에 따라 고려는 다시 한 번 홍건적과 결전을 치러야만 했다. 공민왕 10년인 1961년 10월 20일 10만여 명의 홍건적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서 고려의 영내에 침입했다. 이들이 5일 만에 삭주를 거쳐 이성을 점령하자 고려 조정은 홍건적을 방어하기 위한 지휘부를 편성했다. 방위군을 전진 배치하는 한편 각 도에서 장정을 징발하고 선비와 향리가 출전을 자원하면 관직을 주고 천민
글 싣는 순서 ① 들어가며-공민왕과 홍건적 ② 공민왕은 왜 안동을 피난처로 택했나? ③ 임시수도 70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대항했나? ④ 공민왕이 남긴 문화유산 ⑤ 문화유산의 전승방안 안동은 지리적으로 경북북부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웅부로 명실상부하게 자리매김한 것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몽진을 온 이후부터 이다. 공민왕은 수도 개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파천하면서 왜 하필이면 임시수도로 안동을 택했을까? 왕이 다녀간 뒤 안동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으며 현재의 안동인들에게는 공민왕의 파천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본지는 창사 19주년을 맞아 특별취재팀을 편성하고 관계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어 `공민왕과 안동`을 5회에 걸쳐 기획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