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캐나다에서 살았던 어느 후배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좋은 환경에 풍요롭고 근사한 문화생활을 한다고 해서 행복의 절대적인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그는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긴 늦은 나이에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 처음 느낀 캐나다의 인상은 어딜 가나 울창한 숲, 널려 있는 아름다운 호수와 맑고 파란 하늘에 매료되어, 하나님이 처음으로 지었다는 에덴동산이 꼭 이랬을 것이라고 여겼단다.

환경만큼이나 아름다운 삶을 살 것이라고 여기며 한국의 습관들을 하루속히 버리고 그곳 생활에 적응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한 달, 두 달, 그곳 생활에 익숙해지니 아름다운 숲 속에 묻혀서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일상들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하더란다.

종일 거리를 돌아다녀도 쓰레기 하나 볼 수 없는 깨끗한 거리, 경찰관이 있건, 없건 절대 어기는 법이 없는 교통질서, 이웃을 위해선 숨소리조차 조심하는 그들의 공중도덕을 보면서 그것이 선진국민의 자세로 여겼고, 그런 그들이 참으로 존경스럽더라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느꼈던 그 신선한 충격들이 차츰 무거운 짐이 되더라는 것.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하는 분위기가 엄청난 무게로 다가오면서 그것이 이웃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담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 느끼는 이웃의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더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치는 것이 인정머리다. 서구인들 사이에서 인정머리를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고 한다. 기부문화는 발달해 있지만 인정을 나눈다는 의미에서는 매우 인색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혈연으로 맺어진 단일민족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그곳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 법질서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점을 이해는 했지만 나라 전체의 인상은 진정으로 이것이 사람 사는 곳인가라는 회의였다고 한다.

정이라면 모든 것이 통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정서에 길들여진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세계에 떨어지다 보니 그렇게 느낀 것은 당연했으리라.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으로 여기는 정 문화는 순기능도 많지만 역기능도 많다고 하여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외국생활을 오래하고 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이 오늘날 세계의 많은 나라들과 경쟁하여 이길 수 있었던 한 요인으로서 바로 이러한 면을 꼽는다.

현대자동차가 공장을 인수하여 미국에 진출했을 때의 일이다. 그곳 최말단 생산라인의 직원 중에서 상을 당한 사람이 있어, 한국인 임원들이 문상을 갔다고 한다.

처음엔 그 직원이 “왜 남의 상가에 와서 사생활에 관여하느냐?”며 오히려 화를 내더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남이 어려울 때 찾아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데 “당신이 한국기업에 있기 때문에 한국예법에 따르다 보니 그랬다”는 점을 설명해 주었지만 처음엔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그 후 다른 직원의 대소사에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임원들이 찾아가서 위로하고 축하도 해주니까 미국인들도 서서히 마음 문을 열더라는 것이다.

이제는 한국회사에 근무하는 미국인들은 그러한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단다. 그래선지 이직률이 극심한 미국에서 가장 이직률이 낮은 곳이 한국회사들이라고 한다. 임금이 조금 낮더라도 인정미가 있는 곳을 그들도 떠나기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법 조항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혼탁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법 위에 있는 것이 인정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의 이런 미덕이 점점 사라져간다.

풍요한 물질 만능의 서구사회보다 조금은 부족해도 인정이 넘쳐나는 우리나라가 한 수 위라는 생각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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