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소비생활 촉진해야 대한민국 경제 되살아나”

2008년 총선 당시 환경미화원 출신 국회의원으로 유명세

사회적 약자·서민들 권익 옹호·생활향상 노력 보람 느껴

현재 비정규직 문제, 정부가 나서 정규직 전환 주도해야

" 대부분이 석·박사, 판·검사출신인 국회에서 저 같은 노동자출신이 의정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도 있었고 저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치란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경북 상주의 조그마한 아이에서 아버지를 도와 일하는 소작농으로, 그리고 우유배달과 도로포장일 등 그 옛날 우리네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가족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러다 청소부, 즉 요즘 같지 않았던 냉대 속의 환경미화원 출신의 국회의원. 그가 경북 상주 출신의 홍희덕(비례대표) 민주노동당 의원이다.

인터뷰를 통해 “대부분이 석·박사, 판·검사출신인 국회에서 저 같은 노동자 출신이 의정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도 있었고 저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문을 뗀 그의 꿈은 서민이 행복해지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5명 중의 1명인 홍 의원은 다른 정당의 10배의 몫을 해야 한다. 때문에 의원실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오히려 본회의장이나 상임위에 있는 것도 감사해야 할 지경. 그가 찾아가야 할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있었던 시간. 그 시간에도 그는 쌍용차 문제라든가, 비정규직법 관련 문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경북 상주가 고향이신데,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78년도만 하더라도 아직 우리나라가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70년대 공업화가 진행되고 부동산개발도 진행됐지만 그것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지요. 노동자, 서민들은 그때도 지금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래 초등학교 졸업 후 13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소작농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8년 배곯는 자식들을 볼 수 없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서울에 와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유배달, 도로포장 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93년도에 환경미화원이 되면 자녀들 학자금을 지원해준다는 말에 의정부시에 환경미화원으로 취직하게 돼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상주의 은척 초등학교 당시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그 시절 이야기야 다들 어렵고 힘들던 시기였다는 것이 기억합니다. 십릿길이 넘는 거리를 꽁꽁 언 발과 손을 입으로 불며 학교에 가던 일이 기억이 납니다. 밤에 산길을 갈 때는 무서워서 크게 노래부르며 뛰어가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가난입니다. 다들 가난했지요. 그래서 어릴 적부터 아버지 농사를 도우며 노동을 했습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습니다. 옛날 기억도 많이 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보수적 성향이 강한 대구와 경북 출신으로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대구·경북지역이 좀 보수적이라는 인식이 있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난한 노동자, 서민의 삶을 살아오다 보니 노동자, 서민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진보정당에 가입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93년 의정부시에 환경미화원으로 취직해서 생활이 조금 나아지나 싶었지만 98년 IMF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으로 환경미화원들의 소속이 의정부시 시설관리공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사회적 약자인 환경미화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운동을 하게 됐고 자연스레 노동조합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정치세력화를 고민하고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지난해 총선 당시에 환경미화원 출신 국회의원으로 유명세를 탔는데.

▲처음 국회에 들어올 때는 사실 걱정을 많이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부분이 석·박사, 판·검사출신인 국회에서 저 같은 노동자출신이 의정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도 있었고 저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치란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년 전 처음 들어올 때처럼 임기가 끝날 때까지 노동자, 서민들의 이해를 대변하자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사회적 약자, 노동자, 서민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의원님은 6,70년대를 산 억척스러운 아버지의 느낌인데, 고향민들에게 하실 말씀은

▲과거 6,70년대 우리가 살아갈 때 다들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까? 전쟁 직후 이어진 가난과 수많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우리 노동자, 서민들은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왔습니다. 지금 또다시 경제위기다 뭐다 하면서 서민들의 삶이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대구·경북지역의 서민들의 삶도 많이 힘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힘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노동자, 서민들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온 저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노동자,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저 자신도 다짐하고 있습니다.

-현재 비정규직법 문제로 국회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은 비정규직의 남용과 차별입니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기간을 유예한다던지 하는 방식으로는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금 정부가 나서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주도해야 합니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가 주장하는 비정규직법 개악은 결코 동의할 수 없으며 오히려 비정규직의 사용을 제한하는 형태로 비정규직의 숫자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저임금의 소폭 인상, 그리고 박사 환경미화원 등이 현재 사회의 모습입니다. 의원님이 바라시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있다면.

▲얼마전 2010년 최저임금이 결정됐습니다. 고작 2.75% 인상, 110원이 올랐습니다. 경영계와 정부에서는 경제가 어려워서 최저임금을 오히려 삭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어떻습니까? 경제가 어려우니까 오히려 최저임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 많은 나라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경제가 어려울수록 최저임금을 인상해서 서민들이 소비를 하고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경제가 살아납니다. 한국은 지금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최저임금은 전체 노동자 평균임금의 50%는 되도록 올려야 합니다. 제가 법안까지 제출해놓은 상황입니다. 이명박 정부와 국회가 진심으로 노동자, 서민들의 생활과 삶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홍희덕 국회의원은

1949년 경북 상주 출생, 은척초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 93년 경기 의정부시 환경미화원으로 입사, 2004년 제3대 경기노동조합 위원장, 2006년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초대위원장, 2008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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