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관오리(貪官汚吏). 탐욕스러운 관리와 더러운 벼슬아치. 옛날이야기에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만 멍이 드는 느낌이 아닌가. 국민이 모아준 세금으로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할 터에, 일터에서 얻은 정보를 가로채 자신들만 배를 불렸다. 국민을 대신해서 일하라 했더니, 국민을 속이면서 얼마나 고소했을까. 도둑이 들끓는다 듣기는 했지만, 이처럼 당하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게 만약 공직사회에 만연한 평균적 조류라면, 국민은 누굴 믿고 일상을 이어갈 것인가. 나라의 내일은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 다음세
올 것이 왔다. 오래전부터 예견하였던 인구절벽이 이제는 손에 잡힌다. 새 학기 신입생을 채워야 하는 대학들은 이미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하였다. 전국에서 무려 175개 대학들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여 신입생 유치에 비상등이 켜졌다. 추가모집에도 미달이 속출한다는 게 아닌가. 비수도권 지방소재 대학들에게는 위기가 절벽으로 느껴질 만큼 가파르다. 정원을 채우는 일이 다급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 살펴야 할 문제는 혹 없을까. 우리 대학들은 거의 같지 않은가. 이름만 달랐을 뿐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트렌드와 유행을 좇아 서로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특히 미국은 힘든 상황을 지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수가 오십만을 넘었다. 백신접종과 치료제개발이 희망을 준다지만, 일 년 넘게 경제, 사회, 문화의 틀을 바꿔 놓은 감염병의 여파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류를 힘들게 할 터이다. 나라 간 경제적 질서와 힘의 균형에도 영향을 미치며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도 미항공우주국(NASA)가 우주탐사선 퍼시비어런스(Perseverance)호를 성공적으로 화성에 착륙시켰다. 미국인들은 코로나19의 역경을 잠
학교는 무엇일까. 아침마다 나서는 등굣길은 어떤 느낌인가. 믿고 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있고 반갑게 만나는 선생님이 있다. 밤새도 그리웠던 친구들이 있고 떠난 후에도 그리운 교정이 있다. 가르치고 배운 기억이 한 가득이며 나누고 함께 했던 시간으로 늘 돌아가고 싶다. 그러니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했던’ 마지막 날을 기억하면서,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라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런 학교의 모습이 일그러졌을까. 모든 비겁함들 가운데 가장 천박하고 저열한 것이 ‘폭력’이 아닐까. 학교폭력, 그것도 오래전
문송이라던가. ‘문과여서 죄송합니다’라는 자조적 표현 속에는 문과는 이과와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숨어 있다. 이과적 성향과 문과적 성향이 생각처럼 그렇게 다른 것일까.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여 사람을 생각하는 게 바람직한가. 고등학교 중반부터 우리는 사람을 구분하여 바라본다. 아니 그런 성향을 어릴 적부터 찾아내려 애쓰기도 한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서조차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며 관심을 쏟는 과목이 다르고 깊이가 다르다. 문과는 수학과 과학을 멀리하고 이과는 문학과 역사를 가벼이 본다. 문과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계산과 분석
1억이 넘었다고 한다. 지구상에 코로나19 양성판정을 받은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게 아닌가. 사계절을 건너오며 오르내렸던 감염의 기세가 이제는 꺾이는가 싶었다. 조금씩 내려가던 숫자에 또 다시 충격을 주는 듯 집단감염이 드러나고 있다. 하필이면 교회를 비롯한 종교집단발 무더기 감염이 연일 방역을 힘들게 한다. 코로나19가 사상초유라지만, 14세기 흑사병의 그늘에도 교회가 있었다. 역병의 원인을 인간의 죄로 규정하였던 교회들 탓에 오히려 확산세가 불어났다고 한다. 21세기 첨단의료와 방역의 현장에서 팬데믹 현상에 종교적 원인을 끌어오
미국 대통령이 바뀌었다. 바이든 새 대통령은 ‘회복과 포용을 지표로 삼아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선거는 지난 11월에 있었지만 지나온 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공화당을 지지하는 군중이 의사 진행 중이었던 의회 건물 안으로 들이닥쳐 소동과 폭력을 휘두른 일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전임 트럼프 대통령의 선동 여부가 문제가 되어 그는 하원에서 탄핵까지 당하였다. 민주주의의 모범이라 여겼던 미국의 부끄러운 모습을 전 세계가 보고 말았다. 미국은 이대로 가라앉을 것인가. 아니면 실수를 딛고 다시 일어설
코로나19가 모두 삼켜버렸다. 3차 대유행이 약간 고개를 숙이고 백신과 치료제가 떠오르면서 조금씩 저무는가 한다. 하지만 글로벌세상이 펼쳐지면서 아직 안심하기는 이른가도 싶다. 해마다 이즈음이면 긴장하게 하는 뉴스 자락이 있다. 대학입시. 대학에 들어가는 방법이 다양해져 정시 비중이 줄었지만, 학생을 기다리는 대학의 관점으로는 여전히 중요한 입시시즌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극소수의 수도권 대학들을 제외한 대학들의 정시경쟁률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지방대 경쟁률은 미달을 감수해야 할 만큼 심각하다고 한다. 문제는 어디서 왔으며,
해를 넘기며 가슴 아픈 뉴스가 들려왔다. 입양한 어린아이를 때려죽인 양부모. 세상이 무너진대도 그럴 수는 없다. 그럴 만한 까닭은 도무지 안 보인다. 대학까지 나온 부부는 둘 다 목사님 자녀라고 했다. 교육과 종교는 어디까지 무너져야 하는가.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치지 못하는 학교와 교회는 어찌 입을 다물었는가. 개인의 잘못이라 비난하며 성찰없이 혀만 차고 말 터인가. 안타깝고 불쌍한 건 정인이의 어린 생명뿐일 것인가. 언론이 다루는 수다한 이슈들처럼 짧은 동안만 후루룩거리고 말지는 않을까. 피어나 보지도 못하고 한 아이의 온 세
포항은 어떤 도시일까. 포항을 떠올리면 사람들은 어떤 상상을 할까. 거친 바다, 딱딱한 철강, 투박한 말씨, 거친 느낌 등이 아니었을까. 그랬던 포항이 바뀌어 간다. ‘문화도시’로 지정되었으며 ‘축제도시’로 풍성한 이야기를 담는다. 폐철도를 따라 만들어낸 철길숲은 도시에 숨길을 트이게 하였다. 바다와 육지, 도시와 사람이 함께 호흡하는 지역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의 배경이 되어 전국적인 관심도 자아낸다. 포항은 산업경제도시에 더하여 문화관광도시로 변모해 간다.‘철강 다음은 무엇일까.’ 도시는 같은 질문을 십
12월은 늘 그랬다. 가까이 어울렸던 사람들과 떠나가는 한 해를 아쉬워하며 모이느라 바빴다. 오래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도 새해에는 자주 보자고 한 잔 기울이며 따뜻했다. 망년회와 송년모임이 줄을 이었고, 도시의 불야성은 아쉬움과 희망을 번갈아 목격하였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뜻을 담았다지만, 왠지 언제나 피곤한 뒤끝을 남기는 연례행사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보면 새해 첫 달의 절반쯤이 지나고 있었다.둥둥 뜬 느낌으로 지나가는 한 달. 가까워도 서먹해도 한자리에 모이면 들썩이는 분위기에 해가 저물어가는 한 달. 마지막 한 달은 그래도
한 해가 저문다. 이제 곧 10대뉴스를 간추릴 터이다. 단연 1위는 코로나19가 아닐까. 설 명절 즈음에 찾아온 바이러스는 모든 뉴스를 삼켜버렸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보이지 않는 힘에 먹히고 말았다. 누구의 탓이냐 묻는 손가락질이 끊이지 않는다. 병걸려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절규마저 들리지 않는가. 만나고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관계와 소통이 낯설고 힘들다. 어렵고 고단한 언덕을 넘게 하는 즐거움을 이제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개인도 사회도 무섭게 가라앉은 한 해가 아닌가.국민의 건강은 정치가 아니다
영일만대교는 들어설 수 있을까? 십 년도 넘게 논의하고 검토하며 지역에 필요한 일로 확인하였다. 중앙정부의 30대 프로젝트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던 일이 이제는 예산의 문제로 주춤거린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교통정체를 해소할 방안이면서 관광효과도 기대된다는 게 아닌가. 산업도시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영일만항 물류의 흐름을 확충하고, 글로벌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터이다. 동해안고속도로가 연결되면 국토의 동쪽 허리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핵심통로의 역할도 기대된다. 지역 내 교통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나라의
2020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눈부신 문명을 쌓아 올리던 가운데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온 세상이 얼어붙었던 한 해. 치솟는 감염자 숫자에 마음을 졸이며 삶의 가닥들이 쪼그라들었던 일 년. 사계절을 건너고도 꺾이지 않는 기세 앞에 다음 세대마저 위태로운 오늘. 코로나와 함께 수능의 아침이 밝았다.우리만큼 대학입시에 목숨을 거는 나라가 없다. 수능시험이 헤드라인 뉴스가 되는 나라. 사찰과 교회에서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부모. 하루의 승부에 인생을 거는 수험생 자신. 고등학교 졸업생이 대학 신입생 정원보다 적다는데도, 대학을
코로나19의 기세가 다시 거세다. 겨울로 들어서며 멈추지 않는 환란의 물결에 세계가 얼어붙었다. ‘이 또한 지나갈’ 터이지만 그런 다음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비대면과 마스크는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손씻기와 거리두기는 비정상인가 정상인가. 정상과 비정상을 견주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뉴노멀에 익숙해져 버렸다. 코로나19가 물러간 다음에도 관성처럼 우리에게 머물게 될 낯선 환경이 보이기 시작한다.비대면 온라인 수업에 익숙한 대학생들은 대면 오프라인 강의를 열어도 강의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듣자 하니, 학생들은 기숙사
사람에게 종교는 무엇일까. 살아가는 나날이 버겁고 힘들어 숨구멍이라도 찾는 마음이 아닌가. 힘들게 하는 세상에 눌리고 지쳐 피난하듯 찾는 게 아니었을까. 일상에 쫓기며 살다가 그래도 그 한순간 하늘이 내게 찾아오는 기쁨을 맛보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종교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이 쫓는 욕심을 벗어야 하고 세상이 재촉하는 경쟁도 그만 두어야 한다. 사찰과 교회는 모두의 피난처여야 하고 평화와 기쁨이 솟아오르는 샘터여야 한다. 종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늘을 향해야 하고 이 땅의 버거움을 이기고도 남아야 한다. 무소유를 다짐
미국 대선이 막을 내렸다. 시민들은 선거로 참여하며 민주적 결정과정에 할 일을 다 하였다. 다만, 승자와 패자를 최종 가늠하기에 법적이며 정치적인 판단이 필요할 모양이다. 마지막 진통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이미 가라앉는 듯한 미국의 국격에 또 한 차례 흠집을 내는 결과를 빚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다. 험한 대선의 길목에서 주목받는 사람이 있다.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 여성이자 흑인이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혈통을 가지고 있어 바뀌어 가는 미국의 저변 시민 인구층에 넓은 지지세와 소구력
세상이 힘들다. 삶이 버겁다. 어렵고 고단한 날들이 이어지면, 나만 생각하게 된다. 난관과 질곡에서 탈출할 생각에 붙들리면, 함께 사는 이웃을 잊어버린다. 친구와 가족마저 서서히 남이 되고만다. 급기야 나만의 감옥에 갇히게 되면 살아 버티는 일조차 고난이 된다. 인류가 살아온 자취가 길고 다양하지만, 개인의 삶이 언젠들 즐겁기만 하였을까. 사람 인(人)에 보이듯 사람은 서로 기대어 살아야 한다. 내가 오늘 지나며 누리는 일상의 자락들 가운데 나 혼자 만든 일은 하나도 없다. 사람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를
당신은 잘살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잘사는 것일까. 부귀영화를 누리며 만수무강하는 삶, 모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까. 1975년에 62세였던 기대수명이 오늘은 83세가 되었다. 일인당 국민소득은 1975년에 600불을 겨우 넘겼었는데 오늘은 3만불에 육박하고 있다. 스무 해도 더 오래 살게 되었으며 오십 배나 더 많이 버는 셈이 아닌가. 그 어떤 잣대로 견주어 보아도 손색이 없는 국격을 지니게 된 오늘, 우리는 행복한가 다시 물어야 한다. 겉으로 보아 모자람이 없는 조건 속에서 어째서 우리는 아직껏 만족하지 못하는 일상을 보내고
우리는 어떤 나라를 기대했을까. 누구든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한 일상을 이어가면 부족하지 않은 삶이 가능해 이웃과 함께 좋은 날들을 만나게 되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넉넉한 삶은 아닐지라도 사회의 어두운 구석이 사라지고 어울려 살아가는 일에 그늘이 드리우는 일은 만나지 않는 나라가 아니었을까. 천박한 자본주의에 더는 휘둘리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하지 않았을까.세상은 희한하게도 그렇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한때, 어느 여인의 딸이 대학에서 특혜를 받았던 일에 분개해 대학생들이 분연히 일어서지 않았던가.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