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폴리스의 ‘정복자 다리우스 1세’ 부조(출처 Wikimedia Commons). 그가 두 번의 그리스 침략에도 성공하지 못한 채 죽자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아버지 뒤를 이어 그리스를 침공한다.

기원전 550년경 지금의 이란 땅에 아케메네스왕조가 번성한다. 이후 기원전 529년이 되면서 페르시아 키루스 대왕에 의해 통일제국이 탄생하였다. 페르시아는 나일강 유역의 3천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기간 자연재해 한번 없이 풍요를 누리던 이집트를 평정하고, 오리엔트를 하나로 묶는다.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는 막강 군사력으로 기원전 513년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나선다.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수중에 넣으면서, 해상무역에 사활이 건 그리스와 한판 세기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를 진압한 후 아테네 원정에 나섰다. 현대 서양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사에서 처음 동서양 전투가 개시된다. 페르시아 군이 아테네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늘은 신들의 나라 편이었다. 바다에서 폭풍과 파도가 몰아치는 바람에 300여 척의 배가 침몰하면서 다리우스 1세는 분을 삭이며 회군해야 했다.

다리우스는 절치부심,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는 제2차 정벌에 돌입한다. 당시 페르시아는 군함 600여 척의 막강 해군을 중심으로 보병 2만 5천 명과 기병 1천 명을 비롯해 군사들 사기마저 높아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스 낙소스를 점령한 페르시아는 아테네의 굳건한 동맹 에레트리아 공격에 나섰다. 페르시아는 자신들의 성역 사르디스를 불태운 데 대한 복수로 시민 모두 페르시아로 데려가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창끝을 아테네로 향했다. 이때 아테네는 수성전을 펼쳐 스파르타군이 오기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나가서 맞서 싸울 것인가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이때 아테네에는 밀티아데스(Miltiades)라는 출중한 장군이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아테네 군사는 그리스 동북부 마라톤 평원에서 막 상륙한 페르시아 주력부대를 맞았다. 그리스는 시민군 1만 명이 전부였지만,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자신들이 승리 하리라는 신탁을 듣자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다.

 

아테네 밀티아데스 장군 흉상(출처 Wikimedia Commons). 그는 불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마라톤 전투에서 양익포위전술로 맞서 승리한다. 이후 양익포위전술은 평원전투의 교본으로 거듭난다.
아테네 밀티아데스 장군 흉상(출처 Wikimedia Commons). 그는 불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마라톤 전투에서 양익포위전술로 맞서 승리한다. 이후 양익포위전술은 평원전투의 교본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페르시아군 1만 5천 명만이 해안에 진을 쳤고, 나머지 1만 명은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항해를 이어갔다. 이를 확인한 밀티아데스는 급박해졌다. 아테네에 페르시아 공격을 막을 군사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했다.

이때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마치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처럼 양익포위 전술이었다. 적은 수의 아테네 군사를 페르시아 군과 대등하게 맞서게 한 후 중앙을 얇게 양쪽은 두텁게 포진했다. 페르시아군은 종대로 대열을 맞춰 포진했다. 앞을 향해 나아가던 아테네 군사는 페르시아 군과 거리가 좁혀지자, 진군 속도를 높였다. 상대적으로 중앙군은 속도를 늦춘다.

페르시아 군은 궁수도, 기병도 없는 그리스 군을 오합지졸로 얕보았다. 화살 사정거리에 들자, 페르시아 궁수들이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아테네 군사들은 진격 속도를 높여 사정권을 벗어나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리고 양측의 뛰어난 군인들이 페르시아 옆구리를 쳤다. 적진 뒤를 돌아 포위에 성공하면서 전열이 흐트러진 페르시아 군을 부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군대는 양측을 뚫고 들어오는 아테네군의 전광석화 같은 공격에 기가 꺾이고 말았다. 불과 15분여 만에 거둔 아테네 승리였다.

아테네군 피해는 192명으로 미미한 반면에 페르시아는 6천400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서양 역사가들 주장처럼 동서양 간 최초로 벌어진 전투에서 그리스 승리로 끝났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승리라며 동양 지배, 즉 서세동점의 당위성에 무게를 실었다.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마라톤 전투는 유럽이라는 아기가 탄생하면서 낸 첫 외침이라고 감동한다.

 

다리우스 대제에 의해 제작된 순도 95.83% 페르시아 금화.
다리우스 대제에 의해 제작된 순도 95.83% 페르시아 금화.

고대에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동서양 대립이라는 시각 자체도 웃기는 일이다. 더구나 당시 그리스 문명이 유럽이 아니라 지중해, 즉 오늘날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을 아우르는 곳에서 일어났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문명 역시 아테네보다 페르시아가 더 발달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군국주의적인 스파르타보다는 훨씬 민주적이었다. 스파르타는 노예가 해주는 밥을 먹고, 함께 훈련에 동참했으며, 기형이 태어나면 죽였고, 여자는 원로원 출입도 할 수 없었다. 이 예를 든 것은 문명의 반대가 야만이기 때문이다.

마라톤 전투 승리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전령이 전력 질주해 아테네에 도착한 후 “승리했노라!” 외치고는 쓰러져 죽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 해군이 아테네를 침략하는 것을 서둘러 돌아가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마라톤이 되고 올림픽 공식 종목에 채택되었다. 이때 진군 거리가 42㎞다. 뒤에 195m가 추가된 것은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에서 영국 여왕이 있는 윈저궁까지 거리가 추가되면서 공식화된다. 여왕이 골인 지점으로 들어오는 선수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는 게 정설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