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안作 ‘The land of one’s dreams’

24절기 가운데 여섯 번째가 곡우(穀雨)다. 태양의 황경이 30도에 위치하며, 2024년에는 4월 19일(음력 3월11일)이 곡우(穀雨)다. 봄철의 마지막 절기다.

곡우는 봄비(雨)가 내려 백곡(穀)을 기름지게 하며, 곡식을 뿌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새싹과 새순이 돋아나고, 농사철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절기다. 봄비가 내려 곡식이 윤택해진다는 뜻도 있다. 농촌에서는 못자리를 마련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농사철이 시작된다. 속담으로는 ‘곡우에 모든 곡물이 잠에서 깬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나 마른다’,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 ‘곡우가 넘어야 조기가 운다’와 같이 농사 또는 생활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곡우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다. 날씨는 따뜻하고 습해져서 강우량은 증가한다. 쌀 성장과 성숙에 결정적이며,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하는 시기다. 농촌에서는 이 시기에 모내기한 논을 정비해 물을 가두고, 조와 같은 늦깎이 작물을 심는다.

곡우에 관한 전설이 있다. 이 시기에 극심한 가뭄으로 농민의 삶이 힘들어지자 비가 오기를 지극정성으로 빌었다. 정성에 감동한 젊은 용이 강에서 나와 하늘로 치솟아 구름을 모으고 비를 만들어 가뭄을 해소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용의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곡우를 기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채로운 용 모양의 연을 만들어 하늘 높이 날렸다. 이렇게 용 연날리기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농경 문화권에서는 자연이 인간의 삶에 깊이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풍년을 위해 애쓰는 농민들의 수고로움을 엿볼 수 있다.

곡우 무렵에는 흑산도 근처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가 북상해 충남 해안 격열비열도(格列飛列島)까지 올라온다. 이때 서해에서는 조기가 많이 잡힌다. 이 조기를 ‘곡우사리’라고 한다. 이 조기는 아직 살이 적지만, 연하고 맛있다. 이 때문에 서해는 물론, 남해의 어선들이 몰려든다.

전남 영광에서는 한식사리 또는 입하사리 때보다 곡우사리 때 잡히는 조기에 알이 많이 들어 있어 맛이 좋다고 한다. ‘곡우가 넘어야 조기가 운다’는 속담은 곡우가 지나서 잡힌 조기 즉, 곡우사리의 맛이 최고라는 말이다. 여기서 조기(助氣)란 이름이 ‘사람의 기(氣)를 북돋우는 효험이 있다’고 해서 유래됐다고 한다. 조기는 제사상 음식으로 빼놓을 수 없는 제수다.

곡우는 봄철의 마지막 절기로, 농작물이 성장하기에 좋은 기후를 가져온다. 이러한 곡우의 의미와 전통을 되새기면서 새로운 축제와 음식 등이 이어지고 있다. 차(茶) 중에는 곡우 전에 찻잎을 따서 만든 차를 우전차라고 한다. 곡우 이후에 딴 차에 비해 품질이 더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 조상들은 오랫동안 곡우제를 지냈다. 곡우제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형태의 차이가 있지만, 한 해의 농사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는 같다.

곡우는 음력 3월이므로 음양오행으로 보면 진토(辰土)에 해당하며, 음에서 양으로 넘어오는 경계의 시점이기에 양의 시간을 관장하는 힘이 있다. 권력과 지배욕을 가지고 있으며,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허무맹랑한 비전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어 현실감이 부족하다. 또한 스케일이 지나치게 커 허세가 드러나기도 한다.

동물로는 용(龍)이다. 서로 다른 존재를 아우르는 힘이 있어 비난을 수용하고, 불협화음도 잘 조정한다.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기도 한다. 위급할 때 오히려 차분하며, 과감한 결정을 잘 내린다. 용은 변덕이 심하기에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며, 겉과는 다르게 내면에 어둠을 안고 살아가는 단점도 있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류대창 명리연구자

주역으로 보면 택천쾌(澤天夬)다. 상왈(象曰)에는 ‘하늘 위에 연못이 있는 것이 쾌(夬)괘이니 군자는 이것을 보고 은덕을 아래에 베풀며, 덕에 머물러 있는 것을 피한다’라고 했다. 하늘에 무거운 구름이 잔뜩 드리운 것과 같으니 군자는 이것을 보고 마치 단비가 대지를 적시듯 은택을 아래로 베푼다는 것이다. 군자는 덕에 머물러 있는 것을 피한다고 한다. 즉, 덕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쾌(夬)는 나누어 결단하는 것이라고 설문해자가 설명한다. 다시 말해 소인과 군자의 무리가 섞여 있다면 둘을 구별하여 어느 한 쪽을 과감히 도태시키는 것이다. 소인의 욕심을 경계하는 괘로 설명한다. 인간의 과도한 욕심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단초이기도 하다.

변화하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은 타인과의 화합과 소통을 위해 타인을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요구된다. 서로를 나누고 차별하는 순간부터 고통의 싹은 이미 자라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