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 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3월…. 내일이면 그 중순이다. 절기로 따지면 입춘이 한 달 전에 지났고, 우수 경칩도 지났으니 분명 봄이다. 한데, 나는 절기보다는 달별로 계절을 구분하는 습관이 들어 “3월!”이라고 말해야 봄이 왔다는 기분이 든다.

양지바른 산 자드락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면, 산골 소년은 마른 풀잎 사이에서 솟아오르던 3월 새싹을 만나러 나섰다. 겨우내 땅속에 단잠 자던 싹눈은 3월이면 따사한 햇빛 노크에 눈을 뜨고야 만다. 아지랑이 아롱아롱 눈시울 간질이면 못 이긴 척 기지개 켜고 새싹으로 올라온다. 아지랑이 오름 길 따라 눈길은 절로 위로 향한다. 잎눈 품은 나뭇가지에 봄 새 한 쌍이 노래를 부른다. 노랫가락은 아지랑이 등 타고 파란 봄 하늘에 하늘하늘 올랐다.

3월은 내게 먼저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달이다. 사람들은 가을하늘을 ‘천고마비’라 칭송하지만, 눈 녹은 물이 졸졸 흐르는 도랑 가, 버들강아지 가지 위로 펼쳐진 햇빛 찬란한 3월의 하늘과 비교할 수는 없다. 따사한 해, 몽글몽글 피는 아지랑이, 그리고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새싹들, 뭇 가지에 눈뜨고 피어나는 새잎들…. 이 모든 것을 품은 존재가 바로 3월 하늘이기 때문이다.

지난날, 한 문우는 이메일 끝에 “하루에 한 번 하늘을 바라보자!”라는 자기 경구를 써서 보내왔었다. 나는 답신에 “하루에 한 번은 하늘을 바라보자!”라고 강조 보조사를 덧붙여 보내곤 했었다. 국어사전엔 ‘대조’나 ‘화제’ 또는, ‘강조’의 보조사로 ‘~은’을 풀었으나, 내 느낌은 ‘해야 하는’ 강제성이 강하다. 하여, 그 무렵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 하늘을 바라보거나 응시하게 되었었다.

사람은 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일까. 하늘은 도대체 인간에게 어떤 존재이며 의미일까. 생명 사는 곳을 둘러보면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는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나무, 풀, 동물, 나아가 모래, 돌, 평지, 산, 바다 같은 무생물까지 하늘을 바라보며 그 아래에 살거나 있다. 어쩌면 모든 존재의 본향은 하늘이 아닐까. 한반도의 반대편 남반구에서 보아도 하늘은 같다.

하늘이 무엇이기에 많은 민족의 탄생신화나 설화의 주제가 되어있을까.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하늘이 어떤 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깊은 믿음을 갖게 한다. 사람이 하늘을 두고 이야기할 때는, 물리적 공간의 하늘보다는 뜻을 담는 게 더 많을 것이다. 종교 사상을 빌리지 않더라도, 하늘은 지구촌 공통의 어떤 절대성에 대한 표상이 틀림없으리라. 이를테면 우리 단군신화에서 보듯, 제천(祭天)이나 천명(天命)사상 같은 것 말이다.

하면, 인간은 하늘 앞에서 어떤 존재여야 할까. 하늘 무서운 줄 아는 인간, 민심이 곧 천심임도 아는 사람이라야 한다는 마음이다. 안 그러면 자기 능력도, 업적도, 명예도 이카로스의 날개가 되어버릴 테니까. 한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공익에 눈감고, 사익에 눈뜬 꾼들이 득실거린다. 하늘 앞에 서면, 제 날개가 녹을 것도 모르는 체….

슬프다. 모두가 ‘하루에 한 번은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으면 참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