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성소피아대성당. 1453년 비잔티움을 정복한 메흐메트 2세는 이곳을 모스크로 탈바꿈한다.

꾸준하게 아래로부터 전파를 탄 가톨릭의 생명력은 줄어드는 법이 없었다. ‘보편적인’의 그리스 말 ‘카톨리케’ 어원인 가톨릭이 로마 종교로 합류했고, 박해 속에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났다. 순교로써 박해에 대항하는 이들에게 집권 세력은 공포심을 느꼈다.

종교는 백성을 정신적으로 하나로 묶는 절대적인 요소였다.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종교끼리 느닷없이 동화되는 법은 없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서기 312년에 로마 북부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드넓은 제국을 한곳으로 모을 구심점이 필요했던 그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뒤이어 서기 322년 국가의 보호를 받는 공식 종교로 인정되었다.

325년에 로마 상층부로 스며든 가톨릭이 392년에 일취월장 로마의 국교로 등극한다. 이로써 로마는 모든 종족과 동족이 하나의 종교 아래 흡수되는 정신적 통일의 기초를 마련했다. 330년 그는 수도를 발칸반도의 동쪽 끝자락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 했다.

이때부터 황제가 곧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교회는 갈등의 링에서 본격적으로 맞붙는다. 기독교 정통성의 자부심이 충만한 로마 교회와 황제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콘스탄티노플 간의 대결 구도는 필연이었다. 콘스탄티노플로서 로마 교구는 안티오키아교구, 예루살렘교구, 알렉산드리아교구 등 하나의 교구에 지나지 않았다. 제정일치 시대 황제가 수도를 이전함으로써 교권도 함께 옮겨왔다는 뜻이다.

수도가 옮겨간 뒤의 이탈리아반도는 폐허에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476년 게르만 장수 오도아케르가 서쪽 로마를 점령하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서로마 교권이 차츰 높아지는 선순환을 낳았다. 굳이 콘스탄티노플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을, 기독교가 서유럽으로 전파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경제와 교권마저 동방으로 옮겨간 뒤의 이탈리아 사람들 경쟁심리가 발동하면서 새로운 지도자를 찾게 되고, 당시 그리스도교 수장 로마 주교를 옹립하여 그에게 영적, 세속적 권위까지 안겨버린다. 막바지에 몰린 도시에 향수를 불러내 증오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러나 518년, 유스티아누스 1세가 황제에 오르면서 이탈리아 로마를 되찾는다. 그는 ‘신이 하나, 교회도 제국도 하나, 황제도 하나’란 구호를 내걸고 교회 분열을 봉합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 또한 임시봉합에 그쳤고, 그가 죽자 예수가 그랬듯 3일 만에 갈등이 부활하면서, 때마침 교리논쟁까지 불붙기 시작하였다. 즉, 예수를 신으로 보느냐, 인간으로 보느냐를 두고 죽음도 불사했다.

교리논쟁은 조선시대 파벌적 논쟁 이기론(理氣論)과 비슷하다. 이기론, 즉 이(理 스스로)와 기(氣 에너지)의 원리를 통한 세상 만물의 존재와 움직임에 대한 이론이다. 논쟁이 확산되자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으로 정립되면서 유학에 발전을 가져왔다고들 하는데, 두 이론의 차이를 그리 힘들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말을 탄 사람이 길을 가고 있다. 이때 사람이 간다고 생각하면 주리론, 말이 간다고 생각하면 주기론이다. 간단명료하지 않는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중국 <주자가례>를 두고 예송논쟁을 벌여 얼마나 많은 정적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는가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동·서로마 분열의 결정적인 원인이 또 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4차 십자군이 교회 십자가를 내려 장검으로 사용했다.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주민을 살육하고, 약탈과 도시를 불사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서로마 교황의 부추김이 결정적이었다. 신을 빙자한 경제적, 정치적으로 이용된 침탈이 분명해졌다.

 

체코 프라하 성비투스 대성당 내부. 다소 소박한 동방정교와 달리, 로마 가톨릭에 있어서 성화와 같은 아이콘은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기독교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체코 프라하 성비투스 대성당 내부. 다소 소박한 동방정교와 달리, 로마 가톨릭에 있어서 성화와 같은 아이콘은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기독교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동방의 정교와 로마 가톨릭 두 종교 간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했다. 동방정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274년~337년)가 비잔티움으로 로마의 수도를 옮기면서 시작된 동유럽 중심이 되는 신앙이다. 훗날 발칸반도 사람에겐 신앙을 넘어선 민족의 자존심이자 이민족 지배에 항거하는 절대적인 에너지원이다. 부활, 즉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뜻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상징이다. 부활절을 ‘동방의 날’, 즉 ‘이스트 데이(East Day)’라 부르며 표준, 원래 모습 그대로의 교회 ‘오서독스 처치(Orthodox Church)’라고 한다.

로마 가톨릭에 있어서 교회란 구원의 장소다. 성직자는 구원을 실현하는 막강하고도 이상적인 영적 영역을 부여받았다. 교인의 공동체 교회와 그리스도 교리에 의해 성직자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신의 영역과 인간 세계는 엄연히 구별되고, 교회와 성당이 화려한 까닭은 신앙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수평적 구조의 동방정교 성직자 개인적인 권위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신 앞에서 모두 동등한 지위라는 뜻이다. 생활 속 깊숙이 뿌리박힌 신앙의 실천이 중요했다. 하느님과 인간 세계의 분리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 신이 함께한다는 종교적 개념 때문에 정교일치(政敎一致)는 당연했다. 불교 선종(禪宗)의 견성성불(見性成佛)과 살짝 통하는 맛도 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