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이사한 김에 이불을 빨았다. 몇 년전부터 흰 시트의 오리털이불만 고집하는 남편 때문에 잔잔한 꽃무늬가 있거나 색깔 있는 이불들은 거의 버리고 없다. 흰 이불의 껍데기를 벗겨 세탁기에 넣어 빨고 삶고 건조기로 돌려 말리기만 하면 되니 빨래가 쉽다. 속통도 건조기의 이불털기나 살균 기능으로 돌린 후 뜨거운 채로 꺼내 손바닥으로 탁탁 쳐서 부풀리면 다시 뽀송뽀송해진다. 따끈한 햇빛과 바깥바람을 쏘여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 지 꽤 오래 된 듯하다.

50년도 더 전이었다. 우리 삼남매는 모두 큰 도시로 가 자취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원래 살던 읍내에도 중고등학교가 있으나 교육열이 넘쳤던 부모님의 판단에서였다. 주말이면 셋 중 한 명이 번갈아 일주일치 반찬을 가지러 집에 갔다. 차비 문제도 있지만 주말에도 공부하라는 오빠의 엄한 단속에 나와 남동생은 엄마가 보고 싶고 집밥이 그리워도 참을 도리밖에 없었다.

중학교 2학년쯤 화창한 봄날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온 나는 이웃의 친구를 찾았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집안일을 도우다 곧 대도시의 공장에 취직할 거라는 친구였다. 친구는 같이 강으로 가서 빨래를 하자고 했다. 빨래를 집에서 하지 않고 어디를 가냐는 내 말에 큰 빨래는 강에서 하면 더 좋다며, 소풍같이 바람도 쐴 수 있다고 했다. 못 가게 하는 엄마를 졸라 거죽에 빨간 깃을 댄 겨울이불의 광목호청을 뜯어 양철함지박에 담았다. 빨래방망이와 비누를 챙기고, 양은도시락에 밥과 김치도 야무지게 쌌다.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친구 따라 한참을 걸어 간 강가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적당하게 넓적하고 평평한 돌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물에 적신 이불호청은 열서너 살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그렇게 큰 빨래를 해 본 적도 없었다. 능숙하고 요령있는 친구를 힐끗거리며 낑낑대니 친구가 많이 도와주었다.

빨래터 한쪽엔 불을 피워 커다란 드럼통에 빨래를 삶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약간의 돈을 주면 되나 보았다. 알 턱이 없었던 나는 친구의 도움으로 빨래까지 삶을 수 있었다. 빨래를 가져다주면 물이 펄펄 끓는 드럼통에 넣어 기다란 막대기로 휘휘 저으며 푹푹 삶았다. 건져 함지박에 담아주면 물가로 가져가 방망이로 탕탕 두들겨 비눗기를 뺐다. 어쩌면 양잿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보얗게 흰 호청을 친구랑 맞잡고 둘둘 말아 짜서 자갈이 깔린 강가로 나간다. 많은 빨래들 틈에 자리를 봐서 빨래를 펴두고 돌멩이로 네 귀퉁이를 눌러 이불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까지 꼼꼼한 친구를 따라했다.

빨래가 마를 동안 쨍쨍한 땡볕 아래 따끈한 돌밭에 앉아 싸간 도시락을 먹으며 한참을 친구랑 수다를 떨었다. 나는 학교 얘기, 외국인 영어선생님 얘기를, 친구는 곧 취직할 공장이 있는 대도시의 삶에 대해 꿈꾸듯 얘기하였다. 뜨거운 돌멩이 덕에 빨래는 쉬 말랐다. 네모반듯하게 개어 함지박에 담았다. 머리에 이고 돌아오면서도 한껏 물오른 우리의 수다는 끝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코피를 쏟아 엄마 속을 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