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2월은 늘 왠지 흐지부지하다. 한 달 삼십일을 채우지 않고 끝나면서도 늘 같은 날수가 아니다. 28일이었다가 29일이었다가. 그렇게 마치는 한 달을 보내면 봄이 온다. 봄소식을 기다리면서 학교가 열린다. 아이들이 돌아오고 선생님이 돌아온다. 친구들을 만나면서 아이들은 신이 나겠지만, 교실을 지켜야 하는 선생님들은 삼월 개학이 천근만큼 무겁다. 교육이 본래 가볍지 않은 일이라서 마음이 무겁다면 격려하고 끌어도 올리겠지만, 요즘 선생님들에겐 교육이 아니라 존재가 무겁다고 한다. ‘왜 교사가 되었을까.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 그만두면 무엇을 해야 하나. 계속한다면 무엇에 기대를 걸어야 하나.’ 월요일이 끔찍한 직장인들처럼 선생님들에겐 끔찍하다.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제는 아이들이 두렵다. 부모들에게 떳떳해야 하는데 부모들 앞에만 서면 쪼그라든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하는지 누구도 답을 모른다. 순진한 아이들이야 그렇다해도, 학교를 다녀 본 부모들은 사실은 조금 안다. 교육이란 건 본디 아이들을 선생님에게 믿고 맡겨야 겨우 돌아간다는 것을. 무섭고 때로는 가혹했던 선생님이 계셔서 그래도 우리가 모두 이만큼 자랐다는 것을. 호랑이 선생님 덕분에 질서를 익히고 예절을 배웠다. 매섭던 눈초리로 지켜주신 선생님이 무서워서 한 자라도 더 배우지 않았을까. 오늘 교실은 어떤가. 선생님이 구겨진 자부심을 붙들고 존재를 의심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이들과 학부모가 두려워 교실 문을 열기가 끔찍해진 교실에 진심어린 교육이 살아있을 턱이 없다.

교육이 부끄럽다. 개학을 앞두고 교실이 걱정이다. 학교의 문을 열면서 교육의 내일을 염려한다.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이대로 좋을까. 처음에는 ‘나라의 미래를 기른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을 젊은 선생님들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할만한 직업이 의사밖에 없는 듯이 시끄러운 세상에 교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가르치고 사람을 만드는 일에 어려움이 태산같고 박봉도 견디겠지만, 교육이 살아있는 교실을 지키지 못하면 거기 서 있을 까닭을 잃게 된다. 정상적인 수업이 펼쳐지고 온당한 교육이 진행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교육과정이 중요하고 교육 효과가 중요하지 않을까. 오늘 교육정책을 위한 담론들에는 왠지 누군가 이익집단을 챙겨주려는 저의가 숨어있는 듯하여 불편하기 짝이 없다. 교육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새로운 다짐으로 새 학기를 열어야 한다.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는 기대로 가득해야 한다. 학기가 쌓이면서 쑥쑥 커가는 아이들이 교사들의 보람이 되어야 한다. 철없는 아이들의 비뚤어진 요청에 반듯하게 교육적으로 반응하는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 교육의 테두리를 함부로 생각하는 학부모가 사라져야 한다. 믿고 맡길만한 교사가 되어 교육의 질서를 바로잡는 건 선생님 본인의 몫이 아닐까. 직장인의 월요일이 즐겁고 선생님의 삼월이 즐거워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마음껏 가르치고 배우는 일로만 신이 나는 새 학기가 되었으면 한다. 선생님이 살아야 교육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