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봄이 오는 길목에 눈을 맞으며 설경 속을 거니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 아니었을까 싶다. 더욱이 고향 근처에서 눈 내리는 풍경을 본다는 것은 수십년 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을지도 모른다. 표표히 날리는 눈발이 어릴 적의 추억을 소환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언어의 몸짓으로, 무언의 함성으로 내려앉는 듯했다. 근래 봄비가 잦아들어 벌써 봄인가 싶었었는데 마치 겨울을 환송이라도 하듯 춘설이 나부끼니, 마음은 솜털 마냥 포근했었다고나 할까?

짧게나마 내린 눈과 잎샘추위가 잰걸음으로 오던 봄걸음을 주춤하게 한다. 벌써 산골짝에서는 복수초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뒤뜰의 청매가 진한 향기를 내뿜기 시작해도 아직 봄이 오는 길은 더디기만 하다. 순탄하고 순조롭게 금방이라도 올 것만 같은 봄은, 새침데기 아가씨마냥 이리저리 망설이며 시치미를 떼고 올 듯 말듯 앙탈을 부리는 듯하다. 그만큼 겨울은 끈덕지고 봄날은 인고를 거쳐야 오는 것이리라.

‘매화 옛 등걸에 춘절(春節)이 돌아오니/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춘설이 난분분(亂紛紛)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조선시대 평양 기생 매화(梅花) 시조

얼핏 읽어보면 옛날에 피었던 가지에 다시 꽃이 피듯이 따스한 봄날을 맞이하고 싶지만, 때아닌 봄눈으로 봄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 시조는 평양 기생 매화가 연적(戀敵) 동료 기생 춘설(春雪)에게 애인을 빼앗기고 원망하며 지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자신의 늙어진 몸으로 비유되는 고목에 매화가 다시 피어나길 바라면서 자기 이름과 꽃의 이름을 이중의 뜻이 되게 한 중의법(重義法)으로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시조는, 고목 등걸에도 꽃이 다시 피어나듯이 옛적에 교유했었던 정든 이들이 다시 올 듯도 하지만, 때아닌 봄눈이 어지럽게 흩날려 세상이 복잡해졌으니 못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치적인 의미로도 풀이된다.

바야흐로 40여 일 앞둔 총선으로 정국이 때아닌 봄눈 마냥 어지럽고 뒤숭숭한 모양새다. 연일 끊이질 않는 공천경쟁에 온갖 파문이 일고, 제3지대 신당의 이합집산으로 향방이 주목되는가 하면, 악의적인 딥페이크 콘텐츠 등장과 선심성 정책발표 등 하루하루 점입가경이 따로 없을 정도다. 각각의 정당과 출마자들에게는 아직 올 듯 말 듯한 봄이지만, 저마다 벅차게 맞이할 봄날을 믿고 준비하며 결연한 각오를 다지는 듯하다. 정당정치의 관건인 공천을 위해 타협하고 양보하며 새로운 줄을 서고 온갖 기를 써보지만 여전히 관문은 낙타구멍이니 치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천의 꽃망울이 어렵사리 맺혔다 해도 당선이라는 꽃은 끝끝내 조마조마 필 듯 말 듯할 것이다. 여와 야가 격돌하고 보수와 진보, 관록과 신예가 대항하여 소신과 비전을 관철시켜야 봄꽃으로 일어설 것이다. 냉혹함이 난무하는 올 듯 말 듯한 봄날에 필 듯 말 듯한 망울이지만, 진실과 정의, 공정과 희망의 꽃은 투표로 환하게 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