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부지런히 생명 잉태한 봄꽃들
고요하면서도 힘차게 꽃망울 내밀어

지난 12일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금곡산에 핀 변산바람꽃.
절기상 입춘이 지나면 기온과 상관없이 대지는 이미 봄을 준비한다. 겨우내 대지의 품속에서 부지런히 생명을 잉태한 봄꽃들은 가을꽃과 다르게 대지를 나설 때 꽃망울을 입에 물고 올라온다. 복수초, 변산바람꽃, 노루귀, 깽깽이, 할미꽃 등등 사랑스럽도록 여리고 앙증맞은 우리 풀꽃들은 낙엽 쌓인 마른 산야에 고요하면서도 힘차게 꽃망울을 밀어내며 봄을 알린다.

2월 중순 즈음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오는 봄꽃 중 눈 속을 뚫고 올라오는 복수초가 가장 먼저이고 이어 변산바람꽃, 노루귀 등이 올라온다. 입춘이 지나면 포항에서 가까운 금곡사와 오어지 댓골, 보현산 천문대 등지로 봄의 전령사들을 맞으러 간다. 매년 만나지만 여전히 설렌다. 눈에 잘 띄지 않아 혹여 발에 밟힐세라 낙엽 위를 조심조심 거닐다 언뜻 그들과 마주하게 되면 절로 심장이 멎는다. 그 작고 앙증맞은 변산바람꽃의 속이 비좁도록 옹기종기 들앉은 한 무더기 우아한 꽃 수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경이롭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절로 깨우쳐지는 기분이다.

이렇게 사랑스런 우리 풀꽃들도 나라 뺏긴 설움을 함께 했다. 일제(日帝)로부터 광복된 지 80년을 바라보지만 여전히 곳곳에 잔재가 남아있고 우리의 작고 앙증맞은 풀꽃들의 이름에서조차 예외는 없었다.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시인 이윤옥님이 쓴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에서는 아직도 일제를 벗어나지 못한 식물용어와 국어사전에서조차 알아듣기 힘든 일본말 그대로의 설명이 많음을 밝히며 앙증맞고 예쁜 우리 풀꽃들의 이름에도 음흉하고 질 낮은 일제 잔재의 흔적이 숨겨져 있음을 개탄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개불알꽃과 며느리밑씻개는 꽃을 보는 순간 이렇게 예쁜 꽃에 누가 이렇게 흉측한 이름을 지었는지 의아해진다. 일본인들이 한반도 식물을 채집, 조사하던 일제강점기 당시는 학자들도 우리 풀꽃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주기가 힘들었다. 개불알풀은 앙증맞도록 예쁜 꽃을 두고 굳이 작은 열매가 불알을 닮았다고 개불알로 지었다. 예쁜 우리말 이름인 ‘봄까치꽃’으로 검색을 해도 ‘개불알풀’로 뜬다. 며느리밑씻개의 일본 명칭은 ‘마마코노시리누구이’이다. 마마코(繼子)는 의붓자식, 시리누구이(尻拭い)는 볼일 본 뒤의 밑씻개를 뜻하는 것으로 일본에서도 의붓자식은 작은 가시가 촘촘히 박혀있는 풀로 밑씻개를 해 줄만큼 미웠나본데 그걸 하필 며느리로 번역 했다. 우리 어머니들의 고된 시집살이가 꽃 이름에서도 나타난 것이 더 아프다. ‘개’자가 붙은 식물들 대부분도 일부러 격을 낮춰 부르거나 폄훼한 것들이다. 개나리, 개암나무, 개벚나무 등은 원래 이름 앞에 붙었던 ‘조선’이 ‘개’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야생화 도감을 비롯하여 넘쳐나는 풀꽃과 들풀의 사진첩 대부분이 아무 문제의식 없이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유래를 알 수 없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다행히 봄을 알리는 변산바람꽃은 전북대 선병윤 교수가 1993년 변산반도에서 채집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며 학명을 변산바람꽃이라 명명했다. 한국 특산종인 변산바람꽃은 국가표준식물목록에 의하면 일본학자가 먼저 발표한 일본 바람꽃(節分草)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져 일본학자에게 선취권이 주어진 듯하다. 같은 종이 일본에 있다하더라도 변산바람꽃은 우리 산야에서 그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봄을 알리는 우리의 야생화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동북아생물다양성연구소’에서는 부르기 민망스럽고 욕처럼 들리는 식물명을 순화하여 예쁜 우리말 이름으로 바꾸자는 활동을 하고 있고, ‘창씨개명 된 우리 풀꽃’의 저자 이윤옥 시인은 관계 기관이 유기적으로 일제 잔재가 있는 풀꽃 이름을 대대적으로 정리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는 곧 우리 모두의 바람이기도 하다. /박귀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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