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춰버린 듯 기와집들 준엄
300년 전통 옛 모습 고스란히 간직
파리장서 초안 작성 영남유림 요람
유공자 서훈 12명, 마을 전체가 항일

봉화 바래미마을 풍경.
봉화군청에서 영주시로 나가는 도로변 우측엔 기와지붕을 눌러쓴 고택들이 준엄하면서도 어진 선비의 모습으로 앉아있다. 마을 앞 내성천 물보다 낮은 곳에 마을이 있다고 ‘바다 밑’이라는 뜻의 바래미라 부르는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시간이 멈춰버린 기와집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찾는 이의 몸가짐을 경건하게 해주는 풍경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전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헌납하고 목숨 바쳐 독립을 외쳤던 마을. 우국지사들이 살았던 이곳 바래미마을 전체가 독립운동가들의 고택으로 묵묵히 역사의 무게를 깔고 앉았다.

대를 이어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3대에 걸쳐 36년 옥살이를 한 사람들.‘파리장서’ 초안을 작성한 영남 유림의 요람이 바로 바래미마을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바래미마을 100여 가구 주민들이 만회고택 명월루에 모여 항일운동을 시작한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이 마을 출신 심산 김창숙 선생이 바래미마을을 찾아오고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파리장서) 초안이 만회고택 명월루와 혜관구택 사랑채에서 작성됐다. 독립청원서 서명에 앞장선 사실이 발각돼 바래미마을 김건영, 김순영 등 원로들이 끌려가 고초를 겪은 게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이 사건은 3·1운동과 쌍벽을 이룬 중요한 독립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제1차 유림단 사건 이후 상해로 갔던 김창숙이 6년 뒤 귀국, 바래미마을에 들어와 독립운동 자금을 거둬 전달한 것도 발각돼 모금에 앞장선 김홍기, 김창근 등 8명이 옥살이를 했다. 이것이 ‘2차 유림단 사건’. 이후에도 항일단체인 독서회를 조직해 김중문, 김덕기 등 5명은 구속돼 3대째 수난을 겪었다.

이런 사실을 증명하듯 바래미마을에서는 12명이 독립운동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바래미마을은 300년 전통의 선비 마을답게 옛 모습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개암종택, 팔오헌종택, 학록서당, 추원사, 단사정, 명월루 등이 그 옛날 반촌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 이중 대표적인 마을 안쪽 만회고택은 순조 30년(1830) 과거에 급제해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낸 만회 김건수의 고택이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나라를 잃은 민족은 좌절감에 빠졌지만, 곧 다시 일어나 독립을 향한 의지를 불태웠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를 숙의하고 초안을 작성한 바래미마을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그리고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봉화 출신 9명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고, 국가 보훈처는 봉화군에 있는 한국유림파리장서비를 현충 시설로 지정했다.

가족과 가문의 안위를 뒤로 하고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몸과 재산을 바쳐 헌신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호국정신을 계승해야 하는 게 우리의 책무일 것이다. 옛이야기들이 들릴 듯 시간이 멈춰버린 고택 너머로 흐르는 내성천 물줄기엔 바래미마을의 독립정신이 녹아 흐르고 있다. /류중천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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