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설 연휴를 가족들과 보내고 이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오니 그 며칠간의 모습들이 잔잔한 기억으로 가라앉는다. 차례상도 간소하게 하였고 떡국 올려서 조상님께 한해의 복을 빌어보았다. 자식들에게 세배를 받으며 덕담도 해주고 깨끗한 봉투에 마련해 둔 세뱃돈을 주고 보니 또 한 살 더 먹었다는 세월을 가늠해 보기도 한다.

옛 같으면 형제자매가 설날에 다 모여 북적대며 즐거웠을 텐데 가족 수가 줄어드는 요즈음 그나마 모두 자기들의 생활을 찾아 훌쩍 떠나버리면 허전한 가슴엔 때때옷 입은 손주들의 웃음소리만 귀에 아른거릴 뿐…. 더욱이 이웃 어른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옛날 설날에는 가족들 모두 모여 앉아 윷놀이도 하고 밖으로 나가 들판에서 연날리기도 했었지만 이제 모두 바빠서인지 세시풍속을 즐겨야 할 마음의 여유를 찾기가 힘이 든다. 전통 명절이 조금씩 쇠퇴해 가는 느낌이다.

14일은 밸런타인데이(St. Valentine’s Day)- 여자가 남자 친구에게 초콜릿을 선물한다는 날, 근래 들어 청소년들 사이에서 새로운 세시풍속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유래는 3세기경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병사들은 황제의 허락 없이는 결혼할 수 없었는데,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안타깝게 여긴 성인 발렌티노는 몰래 결혼식을 주례해 주었으며 그 죄로 처형을 당했고, 그 후 순교한 이날을 축일로 기념해 오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1980년대 일본에서 유입됐다. 조선시대에도 ‘연인의 날’이 있었고 경칩(驚蟄)과 칠석(七夕)이 우리의 풍속이다.

밸런타인데이에 주로 초콜릿을 선물하는 것도 1936년 일본의 어느 제과업체가 광고하고 나서라고 한다. 요즘이야 연인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친구나 가족에게도 뜻있는 선물을 하며 새로운 세시풍속이 되고있는 현실이니 농경사회의 뿌리 깊은 전통을 융합해 가며 청소년들의 감각에 맞는 명절로 자리하는 것도 나무랄 수 없겠다. 이날을 계기로 3월 14일은 남자가 여자에게 답례하는 ‘화이트데이’가 있고, 또 4월 14일은 위의 두 날을 기념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짜장면을 먹으며 마음을 다스리는 ‘블랙데이’도 있다. 이러한 날들이 마케팅 목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비난도 받지만 젊은이들 사이에는 매달 14일에 이름을 붙여 ‘포틴 데이’로 즐기고 있다고 한다.

또 24일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라 이것을 숨기려 했다는 ‘일본 음모론’도 있지만 겨울을 보내는 음산한 계절에 사랑을 담은 꽃다발을 건네며 달콤한 초콜릿을 선사하는 맑은 마음을 가지는 것도 좋겠다. 작년 밸런타인데이는 코로나의 사회적 거리가 해제되어 마스크를 벗은 날이었고 올해는 전국 곳곳이 20도 안팎으로 역대급으로 더운 밸런타인데이가 되어 홍매도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이제 입춘첩을 붙여둔 문간에 봄비가 내리고 햇살 받는 창가에 동백꽃 향기가 넘치면 각급 학교의 졸업식도 있고 3월의 개학 준비도 해야겠지…. 세시풍속은 해마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전통대로 반복 거행하는 의례적인 생활행태이지만 세월 따라 조금씩 변하며 새로운 것이 탄생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