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4년 동로마 콘스탄티노폴을 함락시키는 제4차 십자군. 데이비드 오베르 作

서기 83년 로마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했을 때다. 브리튼 섬 북부 스코틀랜드 일대의 칼레도니아족은 사활을 걸고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칼레도니아 칼가쿠스 족장은 로마인을 ‘세상의 악당’이라고 비난했다.

“약탈과 학살을 하면서 웃기게도 제국이라 칭하고, 세상을 사막으로 만든 후 평화라고 거품 문다”

멋진 조상을 둔 민족이다. 그들은 칼레도니아, 즉 ‘강인한 민족’이란 뜻처럼 로마로부터 끝끝내 지켜냈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 유스티니아누스 등 이들이 엮어냈던 로마는 ‘세계의 머리(Caput mundi)’, ‘영원한 도시(la Citt<00E0> Eterna)’라고 불렸다. 페르시아, 이집트, 잉카, 무굴, 오스만트루크, 몽골 등 무작위로 떠오른 제국 중에서도 로마가 앞서는 것은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세계의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정복지라 해도 도로와 수로를 만들어 시민의 일상적인 삶에 혜택을 골고루 부여했던 그들만의 지배방식에 있었다.

도로란 반란에 대비해 정벌을 위한 것일 수도 있었고, 변방 민족이 침략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기반이기도 했다. 로마가 그들이 야만족이라 부르는 민족에게 유린당할 때 이용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조선시대 ‘무도안전(無道安全)’이란 말이 있었다. 도로가 없어야 오랑캐와 왜구 침략을 늦출 수 있다는 사고와 비교하면 들숨 날숨이 가빠진다. 약탈에 무방비로 노출된 변방의 하층민을 구해 줄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왜구가 기승을 부릴 때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폈다. 왜구 침략에 노출되지 말라는 뜻이다. 섬에 들어가 살면 죄를 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도가 우리 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민족 질긴 삶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로마제국의 참 매력적인 특징은 인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정 세금을 내면서 군사, 정치, 행정제도에 온전히 따르기만 하면 로마 시민이 될 기회가 제공되었다. 이뿐 아니라 로마 황제까지 오를 수 있는 기회의 제국이었다. 차별이 만연한 현대와 비교했을 때 파격적인 질서다. 기실 차별에 증오심을 느껴본 인간일수록 차별에 앞장선다. 굴욕을 맛본 그들로서는 신분 차별철폐는 너머의 영역인 까닭이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해본 며느리가 지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란 우리네 옛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이랬던 로마였지만, 뼈아픈 침탈의 역사도 있다. 제국이 관리해야할 땅이 비대해질수록 이민족 침략이 기승을 부렸다. 제국의 땅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데 기력이 달리면서 이민족은 살금살금 간 보기로부터 시작해 점점 노골화된다.

멀게는 기원전 390년 켈트족에 의해 7개월 동안 탈탈 털린 것을 시작으로, 서기 384년 훈족의 침략으로 서로마 멸망, 뒤이어 406년 동고트족, 반달족, 알란족 등 이민족 침략, 410년 서고트족 로마 침탈, 이후 반달왕국의 알라리크에 의한 로마 완전정복, 439년 반달왕국에 의한 지중해 침탈, 특히 455년 로마는 반달족에 의해 보름간 남김없이 털리기도 했다.

 

카를 5세. 에스파냐, 도이칠란트 국왕, 합스부르크왕가 오스트리아 국왕,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비롯해 그에 따르는 왕관과 직함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프랑스 프랑수아 1세와 결탁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변신에 격분해 2만이 넘는 군사를 로마로 보내 무참하게 짓밟았다.
카를 5세. 에스파냐, 도이칠란트 국왕, 합스부르크왕가 오스트리아 국왕,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비롯해 그에 따르는 왕관과 직함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프랑스 프랑수아 1세와 결탁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변신에 격분해 2만이 넘는 군사를 로마로 보내 무참하게 짓밟았다.

‘반달리즘’이란 이때를 두고 한 말이다. 교황 레오1세는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 고문하지 말고, 불태우지 말고, 죽이지 말라 조건을 걸었다. 반달왕국 알라리크 왕은 약속을 지켰다. 단 약탈 기간에 대해 정해놓지 않았던 탓에 보름간 교회 지붕까지 뜯겼고, 황녀까지 포로로 잡혀가면서 로마는 폐허로 변했다.

기독교인에 의한 약탈도 빠질 수 없다. 1204년 교회 십자가를 내려 장검으로 사용했던 약탈의 끝판 4차 십자군이 저지른 동로마 비잔티움에 대한 악행 역시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왔다. 비잔티움 제국이 식물 상태로 놓이면서 로마가 본격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술탄 메메트 2세의 약탈도 기억해야 한다. 그는 3일간 약탈을 허락했다. 그러나 하루 만에 중지 시켰다. 더는 털 곳이 남아 있지 않았고, 죽이고, 강간하고, 노예로 끌고 간 후 남은 것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뿐 만이 아니다. 또 한 번 기독교인에 의한 파괴의 아픔도 겪는다. 1527년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변신(프랑스 프랑수아 1세와 결탁)에 격분해 2만이 넘는 군사를 보내 로마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야만족은 약탈에 만족했지만, 이들은 살인 방화 강간은 물론 도시를 파괴하고, 오랜 서류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지르고서야 멈춘다.

기이하게도 침략당하면서 비대해지는 나라도 있다. 자칭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는 중국이다. 황허 문명, 양쯔강 문명을 자랑하지만, 속내는 이민족 침략에 시달리다 대항하고, 정벌을 꾀하다 먹히면서 비대해지는 중화사상, 즉 문화의 자존감을 지켜온 것이 원인이다. 만주족에 의해 청나라가 태어났고, 더 멀리는 원나라, 거란, 말갈, 서융, 북적, 동호 여진도 중국에 땅을 확장하는 데 한몫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