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청도 신원리 운문사 화랑송 노거수

청도 운문사 소나무를 ‘화랑송’이라 부르면 어떨까.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절 앞날이 궁금했다. 혈기 왕성한 때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으나, 가난이라는 궁핍과 시골 농촌의 힘든 농사일의 굴레가 몸과 마음을 묶어 놓았다. 유년 시절 집안 농사일을 도우며 함께 뛰어놀던 동네 형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둘씩 도시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마을 사람도 알음알음으로 시골 농촌을 떠났다. 청소년 시절 그믐날 감감한 밤을 걷는 기분으로 방황하고 있을 때이다. 팔만대장경에 답이 있다면서, 깨달음을 얻은 스님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고향 청도 호거산 운문사를 찾았다.

 

키 6m·둘레 3.5m·수관 폭은 24m

절 마당에 동서남북으로 뻗친 줄기

우산살처럼 사방으로 쭉 퍼져 나가

붉은빛 근육질 몸통과 엮여 ‘경이’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보호

매년 봄, 뿌리 주변에 막걸리 뿌려

운문사(雲門寺)는 신라 진흥왕 527년에 한 신승이 3년간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곳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그중 대작갑사가 현 운문사이다. 600년 신라 원광 국사가 귀산과 추항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한 곳이기도 하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원동력이 되었다. 1277년 일연 스님이 주지로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하여 우리의 고대 역사를 5천년의 역사로 끌어올려 놓았다. 현재는 승가대학과 대학원이 개설되어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 교육 도량으로 자리매김한 고찰이며 명찰이다.

소문만 듣던 운문사는 산중에 숨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동창천의 발원지를 따라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길은 끝도 없이 연속되었다.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긴 채 창밖의 풍경에 눈길을 보내면서 나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버스 종착 정류장에 내려 숲이 무성한 솔밭 길을 한참 걸었다.

숲속 시원한 솔바람이 목덜미를 핥고 지나갔다. 마침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숲속에 웅장한 절이 나타났다. 댓바람에 주지 스님이 묵는 곳을 찾아서 막무가내로 주지 스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다. 재무 스님이라는 젊은 여 스님이 가로막았다. 스님이 머무르는 도량이니 못 들어간다고 했다.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몸으로 밀치고 들어갔다. 어쩔 수 없는지 주지 스님이 계시는 방으로 안내했다.

 

주지 스님을 기다리는 동안에 별의별 생각이 떠올랐다. 부자가 될 것인지, 높은 사람이 될 것인지, 성공할 것인지, 궁금한 것도 많았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주지 스님이 들어왔다. 생각을 멈추고 주지 스님을 톺아보았다. 인자하고 엄숙해 보였다. 일어나서 공손하게 큰절을 올렸다. 주지 스님께서 놓여진 과자를 먹으라고 했다. 먹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었다. 용기를 내어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저의 손금을 좀 보아주세요”라고 했다. 주지 스님께서는 “손금 볼 줄 모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또 얼굴을 내밀고는 “저의 관상을 보아주세요”라고 했다. 주지 스님께서는 “관상을 볼 줄 모릅니다”라고 했다. 제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앞으로 성공할 것인지 봐 달라고 했다. 주지 스님은 또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 주지 스님께서는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질문이다.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질문이다. 나의 이러한 부끄러운 언행에 주지 스님은 얼마나 당혹스럽고 황당하였을까? 그러나 주지 스님은 조금 뜸을 들인 후 조용히 말씀하셨다. “젊은이, 젊은이의 앞날 인생은 손금에도 관상에도 나타나 있지 않아요”라고 했다. 나의 앞날을 점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로 여기까지 왔는데, 실망의 눈길로 주지 스님을 바라보았다. 이제 일어나 돌아가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자 주지 스님은 “젊은이, 젊은이 앞날의 운명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요, 자신의 앞날은 자신이 개척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쓴 불교에 관한 서적을 내게 주면서 한번 읽어보라 했다. 그 주지 스님은 안말례 스님이었다.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채 인사를 드리고 물러났다. 올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웅장하고 아름다운 소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늘 푸른 솔잎이 햇살에 반짝이며, 바람에 출렁이며 춤을 추었다. 이런 거대하고 아름다운 소나무가 절 마당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니 놀랍기만 했다. 우산처럼 늘어뜨린 푸른 솔가지 잎 사이로 붉은빛을 띤 근육질의 몸통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나무 밑으로 들어갔다. 동서남북으로 뻗친 줄기가 우산살처럼 사방으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우산살이야 일정한 간격으로 짜져 있지만, 솔의 가지는 얽히고설킨 모양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두 나뭇가지가 만나 하나의 몸이 되었다. 그때는 신기한 것으로만 여기고 몰랐지만, 사랑과 효의 나무라 하여 모두가 귀히 여기는 소나무 연리지였다.

소나무도 스스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연리지로 만드는 능력이 있는데, 이는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는다. 단지 도움을 받았다면, 공간과 세월이라는 자연이었다. 공간과 세월은 우주의 바탕인데 이는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고 그렇다고 누구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다. 미래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석가모니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경이로운 소나무 품속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가슴에 품고 온 책을 밤새도록 읽고 또 읽었다. 반야심경을 이해하고, 읽다 보니 개경계를 외우게까지 되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隅),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修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끝없이 심히 깊은 미묘한 법은 백천만겁 만나기 어려우니, 이제 보고 듣고 배우니, 부처님의 진실한 뜻 바로 알기 원하노라-.

그로부터 50여 년이 훌쩍 지나 운문사를 찾았다. 많은 신도와 관광객이 찾아와 처진 소나무 노거수를 보고 감탄을 자아내었다. 소원을 빌기도 하고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아름다움보다 자신감과 자신을 찾게 해준 스승 같은 신령스러운 나무다. 방황을 끝나게 해준 나무에 경배했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키가 6m, 둘레가 3.5m, 수관 폭은 24m로 키의 4배나 된다. 나무의 키에 비해 수관 폭이 이렇게 넓은 소나무 노거수는 아마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보기가 드물 것이다.

 

매년 봄에 비구니 스님들은 막걸리를 소나무 뿌리 주변에 뿌려주고 있다.

원광 국사의 화랑도 세속오계의 이름을 따서 처진소나무를 화랑송(花郞松)으로 부르면 어떨까. “젊은이, 젊은이 앞날의 운명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요, 자신의 앞날은 자신이 개척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주지 스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는 듯 지난 추억이 아삼아삼하다. 화랑송 노거수를 자주 찾아가 볼 수 없지만, 주지 스님이 한 말씀은 내 가슴속에 남아 미래를 설계하고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원광국사의 화랑도와 세속오계

운문사는 원광국사가 일생의 좌우명을 묻는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주었다고 하는 역사적인 절이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고,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고,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일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게 바로 세속오계다.

화랑도의 세속오계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성취하는데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왕조의 항몽 정신과 조선왕조의 의병 정신, 대한제국의 독립 정신으로 이어져 불굴의 민족정기로 자리매김해 오늘날에 이어지고 있다. 혈기 왕성한 청소년 시절에 배우고 터득한 정신은 일생의 버팀목이 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