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설날을 집에서 쇠지 않은 지 꽤 여러 해다. 차례는 성묘로 대신하고 설날엔 가족여행을 같이 했다. 모두 모이면 10명, 경주나 부산엘 갔다. 심지어 대구라도 집 아닌 호텔에서 만나 느긋하고 여유로운 명절 연휴를 즐긴다. 며느리들에게 명절증후군 따윈 물려주고 싶지 않은 나의 결심과 용단이 늘 뿌듯하다.

얼마 전 남편 생일로 온가족이 모인 김에 설날 장소를 상의했다. 며느리들에게 멋진 제안을 해보라고 했더니 핸드폰을 꺼내들고 날짜를 확인한다.

올 설날은 예년보다 좀 늦어 2월 중순께 있다. 큰 아들이 업무 때문에 2월 내내 많이 바쁠 거란다. 특히 인사이동이 있어 설 연휴를 비우기가 어렵단다. 작은 아들도 마찬가지로 설연휴를 온전히 쉴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좋다. 올해는 모이지 말자. 각자 가족끼리 오붓하게 지내는 걸로 하자. 만약 아버님이 서운해 한다면 내가 설득시키겠다. 아들들의 직장형편을 잘 아는 남편은 얼마든지 이해할 양반이다. 그러자 오히려 며느리들이 서운해 하는 기색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큰며느리가 운을 뗐다. 그래도 설날인데 오고 싶어요. 애아빠는 일하고 우리 셋만 올게요. 작은며느리도 저도 같이 쇠는 게 좋아요 박자를 맞춘다. 우리가 서운해할까봐 하는 말이라 생각해서, 난 괜찮다며 오히려 우리끼리 온천이나 가고 싶으니 설모임은 생략하자. 그러자 큰며느리가 제안했다.

그러면 이번 설날 모임은 서울로 정해요. 호텔은 제가 알아볼게요. 형편이 여의찮은 사람은 두고, 아버님 어머님과 우리들만이라도 함께 해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잠시 또 정적. 고맙고 기꺼웠다. 좋아 그렇게 하자. 대구 손주들이 서울 구경을 하는 것도 좋겠다. 저희끼리도 종종 서울로 오라거니 서울 구경하고 싶다거니 얘기하는 걸 본 적 있었다. 그렇게 뉴스에서나 듣던 말 그대로 역귀성이 결정되었다.

친구 중에 안동 명문가 종녀가 있다. 4대 봉사와 묘사에 명절 차례까지 1년 10번 넘는 제사로 손마를 날 없던 엄마의 골물을 늘 안타까워하던 친구다. 친구도 서울에 터잡고 살고, 남동생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니 자손 도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십수년 전, 친구의 아버지께서는 위로 2대 조상을 매혼하는 결단을 내렸고, 당신이 귀경하셔서 제사를 지낸다는 얘기를 했다. 역시 안동 혁신유림다운 결정이라면서도 놀랐다. 그런 발상의 전환과 실천이 오히려 전통을 잇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 노릇은 그렇게 하는 거라 존경심이 생겼다.

큰 며느리는 호텔을 예약했고, 명절 서울 계획을 짜느라 부산하다. 서울 나들이가 처음인 대구의 손주들과 합류할 아이들을 위해 궁궐과 롯데월드를 꼭 넣겠다고 했다. 한복 입혀 경복궁엘 가 수문장 교대식을 보여주고 싶다. 애들이 롯데월드에 가면 나는 짬내어 종묘를 구경하고 싶다. 큰아들이 전화했다. 명절 교통정체로 힘들 거라며 미안해 한다. 무슨 소리, 역주행이라 막히지 않고 수월할 거라고 말하니 펄쩍 뛰는 소리를 낸다. 아이고 어머니, 역주행은 큰일나요, 역귀성입니다. 늙으니 헛말이 자주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