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 서울대 교수
방민호 서울대 교수

가오슝 시는 타이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타이완 남부에 있다. 아주 큰 컨테이너 항구를 가진 항구도시다.

타이완에 대한 나의 기억은 무엇보다 조용한 나라라는 것이었다. 타이페이에 2박 3일 머물러 본 기억밖에 없으나, 그 차분함은 오래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거리의 가게 간판들은 번자체 한자여서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철의 규모나 운영 방식은 한국과 일본을 섞어 놓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한국인, 일본인들과는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몸에 배인, 일본인들과도 다른 차분함 같은 것이 있었다. 억눌려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 큰 실례가 될 것 같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이 절제는 어떤 역사적 경험에서 오는 것 같았다.

이번의 가오슝행은 학교의 공식행사였다. 코로나 이후 학교 구성원들이 처음으로 단체여행을 떠난 것이다. 인천공항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나는 밀린 원고를 생각하며 시름겨워 했다. 세 시간 넘게 일찍 나와 수속을 빨리 마치고 어느 구석에 앉아 마저 일을 끝내려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가오슝 공항에 도착하자 안내해 주시는 분이 우리를 맞았는데, 타이완에서 나서 자란 한국인이라고 했다. 성은 ‘박’이요, 할아버지 때부터 타이완에 살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만주에 계시다 타이완으로 옮겨 왔고, 여기서 어선을 사들여 사업을 했노라고 했다. 그렇게 오래 전부터 타이완에 살았다니. 나는 모자란 소설가다운 호기심으로 이 분의 가계에 흥미를 가졌다.

시가에는 선거의 분위기가 아직 다 가시지 않았다. 이번 선거는 아주 뜨거워서 ‘탈중국’의 민진당 후보 라이칭더가 간신히 승리했다고 했다. 표차가 100만표를 넘지 못했고 국민당의 허우유이 후보도 많은 득표를 했기에, 앞으로 정국이 험난할 것이라 했다.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은 ‘박’ 선생에 따르면 대만에는 한국 해방 당시 3만명이나 되는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했다.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어도 생각보다 많은 숫자였다.

타이완이라면 일본과 일찍 관계가 깊었다. 청일전쟁에 패한 청나라가 일본에 타이완을 넘겨주면서 1945년 일본 패전까지 일본 통치가 이어졌다. 본래의 원주민 대신에 대륙 쪽의 한족이 이주해서 주류 사회를 이루었고, 공산당에 밀린 장제스가 정부를 타이완으로 옮겨 오면서 오래 독재 통치가 이어졌다. 그 사이에 타이완은 일본에 기대어 경제를 운영해 왔다. 도로에는 일본 자동차가 넘치고 거리의 건물들은 일본식 조립 방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한국이 타이완을 ‘배신’하기 이전에 타이완 정부는 한국계, 한국 유학생들에게 아주 관대했다고 한다. 한국이 타이완, 곧 중화민국에 사전에 알리지도 않고 단교하고 지금의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기까지는 말이다.

지금 카타르에서 아시안컵 축구대회가 한창이다. 타이완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한국팀이 지기를, 잘 안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한다. 가오슝에서의 2박 3일, 나는 잠시나마 한국인 아닌 타이완 사람들의 심정이 되어본다. 같은 사태도, 누가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