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슈리성 입구.

평소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던 저희 일행이 오랜 준비 끝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것은 지난 1월 15일 오전이었습니다. 그날 서울의 아침 기온은 영하 7도였는데요. 2시간여의 비행을 끝내고 나하 공항에 착륙했을 때, 활주로의 곳곳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활짝 피어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1천200㎞가 떨어진 섬에 왔다는 걸 고려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풍경임에는 분명했습니다.

비즈니스 호텔에 여장을 푼 일행은 오키나와의 역사를 상징하는 슈리성(首里城)으로 향했는데요. 슈리성은 1429년 오키나와 전체를 지배하는 류쿠 왕국이 탄생한 이후, 류쿠 왕국을 대표하는 최대의 성이자 왕궁이었습니다. 나하 시내 언덕 위에 위치해 전망도 빼어난 슈리성은 2019년 거의 전소된 이후, 지금도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일본 2천엔 지폐에 새겨져 있을 정도로 슈리성은 매우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인데요. 하루 빨리 복원되어 한때 조선과 중국과 일본을 연결해주던 류큐 왕국의 위용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녁에 우리 일행은 오키나와 전통 요리점으로 이동했는데요. 그곳에서는 우미부도(바다포도)나 고야참푸르(여주, 두부, 햄 등을 함께 볶은 요리)와 같은 오키나와의 전통 요리를 맘껏 맛보았습니다. 한창 식사 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오키나와 전통 의상을 입은 한 남성이 뱀가죽으로 몸통을 두른 오키나와 전통악기 산신(三線)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참고로 오늘날 일본의 전통 현악기로 첫손에 꼽히는 샤미센(三味線)은 산신(三線)이 일본 본토에 전해져 토착화한 것입니다. 처음 그 악사는 시마우따(島唄)와 같은 오키나와 전통 음악을 들려주며 분위기를 띄웠는데요.

정작 놀라운 일은 마지막에 일어났습니다. 그 악사는 갑자기 아리랑 가락을 너무나도 구슬프게 연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리랑 가락이 반갑고도 신기했던 우리 일행은 오키나와 악사에게 그 노래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리랑을 자신의 할머니에게서 배웠고, 할머니는 그것을 이웃의 조선인에게서 배웠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아리랑’을 연주한 오키나와 악사.
‘아리랑’을 연주한 오키나와 악사.

악사의 할머니에게 아리랑을 가르쳐 준 조선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키나와 역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라사키 모리테루의 ‘오키나와를 안다, 일본을 안다(沖縄を知る 日本を知る)’(1977)는 오키나와 입문서로 유명한 책인데요. 역사학자 김정자는 2016년 이 책을 ‘오키나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하면서, 부제로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늘 이 부제보다 오키나와의 특징을 정확하게 압축해 놓은 말은 아마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본래 오키나와는 류큐라는 이름으로 중개무역 등을 통해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온 독립 왕국이었죠. 그래서 류큐의 전통문화에는 중국과 조선의 흔적도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랬던 것인데, 일본은 일찍부터 류큐 왕국에 손길을 뻗쳐, 1609년에는 사쓰마번이 무력으로 침략하고, 1872년에는 류큐국을 류큐번으로 격하했으며, 1879년에는 아예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여 일본에 편입시켜 버립니다. 그러다 1945년에는 2차대전 중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지옥의 땅이 되어버리기까지 합니다.

오키나와전은 참으로 끔찍한 전쟁이었는데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일본 군부는 오키나와(인)를 바둑판의 사석처럼 여겼습니다. ‘본토 결전’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고, 천황제를 지키기 위한 평화교섭의 길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사항전을 하고자 했고, 온갖 흉악한 일들을 벌여 미군으로 하여금 본토에 상륙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만들고자 했죠.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런 일본군의 눈에 오키나와인의 생명이나 존엄 따위가 들어올 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광기 속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일본군의 (반)강제에 의해 집단자결하는 일이 속출했습니다. 어찌 보면 침략자일 수도 있는 일본 제국을 위해 수많은 오키나와인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오키나와전에서는 본토 출신 군인 약 6만5천 명과 오키나와 출신 군인 약 3만 명이 희생되었고, 무려 10만 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10만이라는 희생자 수는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이때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오키나와전에서 징용 또는 종군위안부로 한반도에서 강제연행 된 만여 명의 조선인 또한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식당에서 만난 악사의 아리랑은 일제시대 오키나와에 끌려온 수많은 조선인들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아리랑보다도 그 악사의 아리랑이 더 슬프게 느껴졌던 이유는, 거기에 지난 시기 동아시아의 비극이 녹아 들어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