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면…
북쪽 함경도 출신 가객 이용악 시인
시 ‘그리움’서 설경 품은 겨울애상 예찬
김남일 작가의 ‘한국 근대문학 기행’
함경도·평안도·서울·도쿄 4개 주제로
한국 근대문학사 배경 찾기 재미 쏠쏠

우리 문학의 배경이 된 곳으로 독자들을 데려가는 김남일의 ‘한국 근대문학 기행’.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다’.

부정할 수 없는 이 사실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절실하게 체감하게 된다. 2024년 푸른 용의 해가 불과 며칠 전 시작된 듯한데, 벌써 그 첫 달이 다 지나갔다.

한국 곳곳이 혹한과 폭설에 몸살을 앓고 있는 겨울의 한복판. 아직 새해 계획을 온전하게 세우지 못한 사람이라면, 지루한 일상을 훌쩍 떠나 낯선 여행지에서 남은 11개월 동안 무엇을 할 것인지 궁리해보면 어떨까.

눈발 흩날리는 풍경을 보며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싣는 건 누구에게나 설레는 일이다. 이럴 때 맞춤한 시가 있으니 바로 저 먼 북쪽 함경도 출신의 가객 이용악(1914~1971)의 ‘그리움’이다. 이런 노래다.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북한 땅을 가보기는 어려우니 이 책을…

시에 등장하는 ‘백무선’은 함경북도 백암(白巖)에서 두만강 침엽수림을 가로질러 무산(茂山)에 이르는 철길의 이름. 겨울 강과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들 사이를 달리는 기차를 상상하면 ‘낭만’이란 단어가 연이어 떠오른다.

하지만, 최근 남북 관계를 감안하면 그게 함경도이건 평안도이건, 두만강이건 압록강이건, 백두산이건 묘향산이건 북한 땅을 여행하기는 한동안 불가능할 것 같다.

새해 벽두부터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각종 언론 보도를 통해 들려오고 있다. 평화와 공존을 지향해야 할 남북한 모두에게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멀리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도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시대지만, 남한 사람들에겐 여전히 금단의 땅으로 남아 있는 북한.

그러니, 지금은 앞서 언급한 함경도 시인 이용악과 평안도 출신의 시인 백석(1912~1996)의 시를 읽으며 북녘을 여행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여기에 형편상 겨울 여행을 준비할 수 없는 이들을 위로해주는 책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김남일(67)의 ‘한국 근대문학 기행’이다. 책을 낸 출판사는 ‘한국 근대문학 기행’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지도에서 사라진 길, 마음마저 멀어져 쉬이 갈 수 없는 곳, 그 길을 안내하는 소설가 김남일이 글로 그린 근대의 풍경이다. 책은 한국 근대 문학의 출발지이자 보고인 서울에서 시작한다. 식민지 ‘경성’에서 개화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작가들은 소설과 시를 통해 그 시대의 언어로 세상을 그렸다. 당대의 작가들이 보여준 생활상과 시대정신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도에서 사라진 북한 지역까지 넘나들며 ‘한국 문학의 영토’가 어디까지 뻗어 있었는지를 되새기게 해준다.”

문학을 집에 비유하자면 그걸 구축하는 3가지의 중요한 기둥이 있다. 가장 먼저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라는 것. 이를 통상 주제, 혹은 주제의식이라 칭한다.

두 번째는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인물이다. 산문 형식을 취하는 소설은 물론이고, 운문이라 해도 담시(譚詩·이야기 형태의 짧은 서사시)의 형식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축이다.

마지막은 우리가 학창 시절 교과서와 참고서에서 여러 차례 배운 바 있는 배경. 이 3가지 기둥으로 완성되는 것이 바로 소설과 시다.

 

함경도 가객 이용악의 시집.
함경도 가객 이용악의 시집.

□ 김남일이 안내하는 함경도와 평안도

장편소설 ‘청년일기’와 ‘국경’,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산을 내려가는 법’ 등을 출간하며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해온 김남일은 반세기 가까이 성실한 태도로 소설과 산문을 써 온 작가.

고통 속에서 핍박 받는 제3세계에 대한 관심도 커서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창립을 주도했고, ‘아시아 문화 네트워크’와 문인단체 ‘한국과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에서의 활동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 근대문학 기행’은 바로 그 김남일이 문학의 3요소라고 부를 수 있는 주제, 인물, 배경 중 ‘배경’에 주목해 한국 문학사를 정리한 노작(勞作)이다. ‘함경도 이야기’ ‘평안도 이야기’ ‘서울 이야기’ ‘도쿄 이야기’ 등 모두 4권으로 엮였다.

한국 근대문학의 역사는 이미 100년을 넘어섰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시기, 여기에 집약적 경제개발 시대와 짧지 않은 시간 이어진 군사독재시대. 그 시간을 넘어 억눌린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빗발쳤던 1980년대를 거쳐 오늘까지.

지난 몇 년에 걸쳐 서울과 도쿄, 함경도와 평안도 곳곳에 숨겨진 이 나라 근대문학의 배경을 찾아다니며, 선배 작가들의 시와 소설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살핀 김남일. 그는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우리 문학의 근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말 그대로 풍경화였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이어 죄인처럼 수그리고 코끼리처럼 말이 없던 이용악의 두만강이나 어느 날 소설가 구보 씨가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식민지 서울의 도처처럼 우리 문학의 무대로서 뚜렷한 아우라를 지닌 장소들. 진달래꽃이 피고 지던 소월의 그 영변이 이제는 끔찍하게도 핵으로만 기억된다. 이럴진대 100년 전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는지, 또 제 고향 평안도에 가서는 다시 이름도 생소한 팔원 땅에서 추운 겨울날 손등이 죄 터진 주재소장 집 가련한 애보개 소녀를 만났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알아보고 싶었다.”

□ 책 속에서 여행하는 미답의 땅

‘한국 근대문학 기행’에선 독자들이 잊고 살았거나, 소홀히 살피며 넘어갔던 소설과 시의 공간적 배경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서울 이야기’에선 장마철 북촌 풍경과 종로를 서성이던 어린 소녀, 시인 이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함경도 이야기’에서는 함경선 기차에 오른 소설가 이석훈과 두만강을 서성이는 작가 최인훈의 그림자가 바로 어제 일처럼 자연스레 떠오르고 있다.

평안도를 설명할 때 시인 백석을 빼놓을 수 있을까? 당연히 없다. 백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우난골’이 대체 어떤 곳이었는지, 20세기 초중반 평양은 작가들의 문학적 영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할 수 있는 건 ‘평안도 이야기’에서다.

관동 대지진과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단어를 발음할 때면 연상 작용처럼 떠오르는 일제강점기 도쿄.

일본 군국주의 수도의 뒷골목에서 울분과 환멸의 술잔을 들고 비통해하던 젊은 조선 작가들의 영상은 ‘도쿄 이야기’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김남일이 내놓은 4권의 책은 독자들을 우리 문학과 예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행자로 만들어준다. 눈보라 치는 함경도, 또는 삭풍에 마주 선 움집에서 여우 울음소리를 듣는 평안도를 대리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책에서 아주 멀어진 21세기 오늘. ‘한국 근대문학 기행’은 김남일의 문학적 열정과 출판사 학고재의 통 큰 결정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을 접한 문학평론가 고명철은 “문학의 시선으로 함경도의 사회문화와 문화지리를 재미있게 풀어낸 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 문학사를 공부하면서 미처 주목하지 못하고 스쳐갔던 지명, 배경, 사건, 풍속 등 함경도의 박물지가 거느린 이야기에 매료됐다”는 감상을 전했다고 한다.

이런 ‘독서의 기쁨’, 나아가 책을 통해 미답(未踏)의 여행지로 떠나는 즐거움을 여러분도 누려 보길 권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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