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장은재의 명품 노거수와 숲
⑬ 청송 금곡리 비학송

하늘을 나는 학의 모습을 한 청송의 비학송.

경북 청송(靑松)은 늘 푸른 솔의 고장이다. 낙동정맥의 크고 작은 산줄기에 에워싸여져 함부로 범접하기 힘들다. 청송으로 처음 전근을 오거나 부임한 사람들은 산 고갯마루 길을 넘을 때마다 오지란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청송을 떠날 때는 정들어 섭섭한 마음에 눈물 흘린다고 한다. 나 또한 그랬다. 청송이란 고장은 올 때도 떠날 때도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금이야 산 고갯마루를 넘는 도로는 터널을 뚫어 빠르고 편하게 청송을 드나들 수 있지만, 그 옛날에는 산 고갯마루를 넘는 버스는 곡예사와 다름없었다.

청송의 자연은 아름답다. 깨끗한 하천은 녹색의 산자락을 부여잡고 굽이굽이 돌면서 골골이 흐른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은 산마루에 걸터앉아 가던 길을 멈추고 숨결을 고른다. 맑은 공기, 깨끗한 물, 늘 푸른 솔, 산소 카페의 고장이다. 청송인은 예와 효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비처럼 곧은 절개와 고결하고 순결한 성품을 닮기 위해 늘 송죽매난(松竹梅蘭)을 가까이하고 문예를 즐기며 좋아한다. 남북으로 가로지른 길 따라 아담한 마을에는 솔밭과 함께 옹기종기 고구마 줄기처럼 형성되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높은 언덕 위에 숨어 살던 노거수
우회도로 생기면서 모습 드러내

나이·키·둘레 적힌 이름표 없지만
학의 날갯짓 닮은 모습은 ‘비학송’
새하얀 눈옷 입은 자태에는 ‘설송’
구불구불 승천하는 ‘용송’ 떠올라

청송읍 소재지에서 국도를 따라 영천으로 가다가 금곡리 도로변 무명의 소나무 노거수를 찾았다. 높은 언덕 위에 숨어서 살던 노거수가 우회도로가 생기면서 본의 아니게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접근할 길이 마땅찮아 절개된 풀숲 언덕을 기어올랐다. 사과밭을 지나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아직 무명이어서인지 나이, 키, 몸 둘레 등을 기록한 이름표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노거수 나이에 대해서 궁금해한다. 오래된 나무의 나이를 측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무는 한 해에 하나씩의 나이테를 새기기 때문에 나이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노거수 나이테를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몸에 구멍을 뚫어 나이테 수를 세어 본다는 것도 해서는 안 될 짓이다. 나이테 측정기로 나무를 뚫어 본다고 해도 오래된 노거수는 속이 비어 나이테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저런 이유로 노거수의 나이를 정확히 측정하기는 힘들다. 기록이나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 등 다른 나무와 비교하거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나이를 측정할 수밖에 없다. 가장 궁금하게 여기면서 정확히 아는 것은 힘든 일이다.

소나무 노거수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굵기와 수형에서 세월의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범상치 않아 보였다. 도로 옆 언덕 위에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학의 날갯짓 모습이었다. 날으는 학이라 하여 비학송(飛鶴松)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눈옷을 입은 날이면 설송(雪松)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가까이 가서 보니 용송(龍松)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하늘을 향한 범상치 않은 가장이 모습이 용틀임하는 용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바라다보는 방향에 따라 비학송으로 보였다, 설송으로 보였다, 용송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대상물이 다양한 모습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만이라도 비학송, 설송, 용송이라는 몇 가지 별호를 붙여주고 보호수라는 이름표를 달아주고 싶다.

소나무 노거수는 잎의 녹색을 강조하기 위해 여름에 촬영한다고 하지만, 예외가 있구나, 청량한 하늘 아래 은세계의 비학송은 지상천하(地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그림자로 보아 햇볕에 남아있는 솔가지의 잔설이 주변 경관과 조화롭다. 흰 눈으로 목욕한 녹색의 솔잎은 더욱 짙고 금방이라도 날갯짓하며 날아오를 것 같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편안하게 하고. 또한 기쁘게 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아름다운 미를 창조하고 또 그것을 찾아 노래하고 있다.

소나무 노거수는 고결하고 숭고한 모습으로 마음을 정결하게 해준다. 맑은 하늘 아래 소나무 노거수는 순결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흰 눈옷을 입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 티 없이 맑은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 맑고 순수해 고결한 품위를 갖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다. 바쁜 생활 속에 자신도 잃어버리고 경쟁 사회에 내몰려 허상을 쫓아다니느라 구정물에 몸은 더럽히고 허물에 마음은 주접이 든다. 설송을 보고 있으면 고결한 품성을 갖춘 사람으로 닮아가고 싶어진다.
 

소나무 노거수는 울퉁불퉁한 붉게 물든 근육질이 오른쪽을 돌면서 나선형 곡선을 이루고 있다. 근육질의 몸통이 하늘 높이 치솟으면서 붉게 물들고 솔가지는 용의 발톱을 하고 있다. 땅에 덮인 흰 눈에 대비된 종아리의 검은 근육질은 더욱더 검게 보인다. 몸통의 거북 등 껍질은 수백 년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연륜이 있어 보인다. 용은 상상의 동물로써 우리에게 무한한 힘과 용기, 가능성을 심어준다. 올해는 갑진년 청룡의 해이다. 청룡이 상징하는 행운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해본다.

인공적으로 심어져 기른 것인지, 자연적으로 생육하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태풍에 의해 훼손될 수도 있고 낙뢰로 훼손될 수 있다. 송진이 많은 소나무는 낙뢰에 의하여 불이 붙으면 모두 타버린다. 독립적으로 생육하는 수목은 낙뢰와 태풍, 돌풍의 과도한 에너지의 집중으로 피해를 쉽게 입을 수 있다. 따라서 주변에 에너지를 분산할 수 있는 단목군 수준의 수림 조성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주변은 묘소가 있고 개인의 사과밭이 있어 그것도 어려울 것 같다. 도로변에서 접근할 수 있는 길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발자국만 남기고 떠나려니 미안한 마음이 앞서 두 팔 벌려 안아본다. 얼마나 덩치가 큰지 품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만수무강을 마음속으로 기원해 본다.

노거수에 대해 뭐가 궁금한가요

첫째, 수령이 얼마나 되었는지? 둘째, 크기와 수형은 어떤지? 셋째, 언제 누가 심었는지, 아니면 자생한 나무인지? 궁금증은 이처럼 크게 대별된다.

노거수 안쪽 나이테 부분이 잘 썩어 정확한 수령 측정이 힘들다면 기록이나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 등 다른 나무와 비교하여 나이를 측정할 수 있다. 크기는 실제로 도구를 가지고 가슴 높이의 둘레 길이를 재어보면 된다. 이를 흉고 둘레라 한다. 수관 폭은 동서남북으로 뻗은 가지의 길이를 재어본다. 인공인지 자생한 나무인지는 기록을 통하여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특별한 일을 기억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 옛사람들은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으며,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 아들은 소나무처럼 사철 푸른 절개를 가진 선비가 되라는 의미였고, 오동나무는 딸이 시집갈 때 장롱을 만들어 주기 위해 심었다.

소나무는 솔처럼 생긴 잎 모양새와 가마솥 설거지에 사용되었던 솔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예전에는 솔방울로도 가마솥 설거지를 하였다. ‘솔’은 정감이 가는 이름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