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정 시인
이희정 시인

혼자서 색종이를 접는 날이 많아졌다

세상을 좋아하던 엄마가 미웠다

시샘은 발이 빨라서 따라갈 수 없었다

엄마를 접었는데 마귀할멈이 보였다

마음속 독사과가 고개를 쳐들었다

시샘은 천사의 날개를 잃어버린 아이였다

접혀진 색종이의 뒷면이 궁금했다

엄마의 뒷모습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표면은 거짓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

- 인은주, ‘시샘의 뒷면’ 전문 (가히 창간호)

사랑도 분석이 될까? 사랑에는 창조적인 모습과 파괴적인 모습이 있다. 사실 세상을 살면서 겪는 많은 일에 두 모습이 모두 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신 에로스가 가진 화살은 똑같은 화살이 아니다. 금과 납으로 만든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종류의 화살이 있다.

여기 사랑 안에 상처받은 아이가 산다. 짐작건대, 내향적인 아이는 엄마를 좋아하지만, 바깥으로 바쁜 외향성의 엄마와 사랑을 갖기에 충분하지 않다. 종종 아이는 심리라는 내면의 집에 혼자 거주한다. 동물학자 로렌츠의 흰 기러기 실험에 따르면, 새끼는 어미가 일정한 크기로 보여야 안심한다. 맨 처음 자신에게 각인된 어미의 크기가 있어서, 그 크기보다 작게 보이거나 크게 보이면 새끼들은 불안해한다. 새끼 오리들이 어미 뒤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뚱거리며 따라가는 모습, 그 사소한 장면에 자연의 오묘한 법칙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펼치는 삶의 장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의 눈에 엄마는 크고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 시인이 접는 색종이의 접힌 내면으로 들어가 보자.

자주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는 종이접기를 한다. 기다리는 견딤이 반복되는 아이는 화가 나기 시작한다. 욕구나 욕망은 해소되지 않으면 대상에 대한 집중이 커지고 충동성이 높아진다. 해서 공격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엄마를 접었는데 / 마귀할멈”이 보이고, “마음속 독사과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사랑과 증오는 다르지 않다. 사랑이 없으면 증오가 없고, 증오가 없으면 사랑도 없다.

인은주 시인의 ‘시샘의 뒷면’은 호주의 M.L. 스테드먼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The Light Between Oceans’의 한 장면을 불러오게도 한다. 영화의 주 배경인 바다가 있는 풍경의 등대는 ‘야누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야누스는 로마신화에서 문의 수호신이다. 문은 생명과 계절의 시초를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영어에서 1월, January가 ‘야누스의 달’을 뜻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서 아이를 잃은 한 모성이 보상으로 타인의 아이를 취하는 죄를 범한다. 끝과 시작의 경계에 있음을 뜻하는 ‘타인의 아이를 훔쳐 기른다’라는 행위의 양면성을 야누스의 등대를 통해 상징하고 있다.

이렇듯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어머니가 있다. 자녀를 중심에 놓고 사는 어머니와 자신의 사회적 성취를 중심에 두는 어머니, 친모 같은 계모, 계모 같은 친모 등 종종 사회 일각에서 충격을 주는 신데렐라형 계모의 유형들이 있다. 아이들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 또한 등대가 비추는 측면에 왜곡해 인식하기도 한다. 인은주 시인의 시적 자아는 야누스의 등대처럼 자신의 깊은 심연과 반대쪽의 그늘까지도 비추고 있다. 우리의 눈은 밖을 향해 있다. 외부는 잘 보지만 스스로는 보지 못하기에.

그녀가 접는 종이접기의 시간은 시인의 창작공간과 같은 위치임을 짐작하게 한다. 문명화된 “표면이 거짓이란 걸”을 견딜 만큼 강해질 때까지, 우리의 눈이 에덴동산에 충분히 머물도록 내버려 두면 어떨까.

“시샘은 발이 빨라서 따라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