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희 수필가
윤명희 수필가

문틈으로 노란가방이 먼저 들어온다. 호박죽이다. 같이 먹자는 친구의 전화를 미리 받은 나는 손부터 내밀었다. 사무실에 들어오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내 뒤의 그를 아는 척했다.

“어머나, 00씨 맞죠? 오랜만이네요. 30년만인가?”

반갑게 말을 건네는 그녀와는 달리 그의 얼굴은 살짝 당황한 기색이다. 서로 아는 사이냐고 묻는 내게 그는 멋쩍은 웃음과 몇 마디의 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친구가 오래전 인연들을 꺼내자, 그는 주머니의 담배를 꺼내며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예전에 같이 일한 동료라고 했다. 전혀 반갑지 않아 보이는 그의 표정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는 평소에 가끔 내 사무실에 왔다. 일이 먼저였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았다. 그를 더없이 반듯한 사람이라고 평하자, 친구가 씩 웃는다.

“왜? 아니야?”

그녀는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 생각이나 했겠냐며 세상 좁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나는 유리문 너머로 그를 찾았다. 그는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겠다는 손짓을 하고는 사라졌다. 보이고 싶지 않은 그의 지난 시간보다 예고도 없이 부닥친 그의 마음이 내게로 왔다.

20년도 훨씬 더 전, 남해에 있는 사량도에 가는 길이었다. 바다색이 하늘만큼 눈부셨던 날, 모처럼만에 떠나온 여행지가 섬이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한껏 부풀기에 충분했다. 친구들의 수다에서 빠져 나온 나는 배 후미 난간에 턱을 괴고, 배가 지나온 길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새우깡을 받아먹던 갈매기도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육지가 눈에서 사라진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은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잘못 봤나? 안경을 바로 하고 다시 봐도 큰댁 아주버님이 확실했다. 생각지도 않은 만남에 정신없이 인사부터 했다. 놀라기는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맞받아 인사하는 그의 눈이 내 옆을 살폈다. 그 눈길을 따라가자 한 남자가 보였다. 조금 전까지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물살을 내려다보던 남자다. 그 남자도 흘낏 그를 돌아보았다. 마치 불륜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그 남자와 나는 ’오늘은 산행하기에 참 좋은 날씨네요’ 정도의 지나가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겠지만, 보이지 않는 진실보다 보이는 그림이 먼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의아한 눈빛을 한 아주버님과 헤어진 나는 괜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가 집으로 돌아가서 조금 전에 본 그림을 슬쩍 흘린다면? 그저 나를 봤다고만 해도 어떨까? 만들어지지도 않은 시댁식구들이 끌고 갈 이야기가 신경 쓰였다.

남편을 찾아 나섰다. 육지와 섬을 이어주는 배안에는 지리망산을 오를 등산객들의 엇비슷한 옷들로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선실에서 다리 펴고 내 친구들과 얘기 중인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형님? 여기서 형님을 만났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의 그를 끌고 아주버님을 찾아다녔다. 그 많고 많은 날과 시간 중에 하필이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그것도 망망대해를 달리고 있는 작은 배의 후미에서 만나다니.

실은 사량도에 가자는 내 말을 남편은 처음에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몇 번 권해도 친구들과 잘 다녀오라고만 할 뿐, 갈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혼자 가도 되지만, 이름난 섬을 그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우리 둘이 내는 회비의 몇 곱절해도 절대 그 먼 섬을 다녀올 수 없다며 몇날며칠을 졸라댔다. 마지못해 따라와 구세주가 되어 준 남편에게도 그날은 오래 기억되었다.

친구와 나는 호박죽을 먹으며 보이지 않는 진실과 보이는 그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다 그녀가 잠시 밖으로 나갔다. 손을 닦으며 들어온 그녀가 화장실 입구에 원래 CCTV가 있었냐고 물었다. 공동화장실에 개인적인 쓰레기를 갖다버리는 이를 찾기 위해 얼마 전에 달아놓은 것을 봤나보다. 친구는 어딜 가나 쳐다보는 저 물건 때문에 자유롭지 않다고 했다. 우리의 흔적이 안 보이는 곳은 어디 없냐고 묻기에 나는 손바닥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