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희 작가
유영희 작가

진보 성향의 어느 작가가 보수 성향의 언론에 칼럼을 기고했다가 진보 언론에서 오던 칼럼 요청이 끊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종탁의 ‘칼럼의 이해’라는 책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여기에 나온 사례는 위와 반대로, 진보 성향의 언론이 보수 논객의 칼럼을 실었다가 찬반 논란이 심하여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고 한다.

신문에는 오피니언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 사설과 칼럼 두 가지가 있다. 사설은 신문을 발간하는 언론사의 의견을 담고 있어서 그 언론사의 성향과 일관성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굳이 글쓴이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칼럼은 개인의 의견이나 주장 또는 감상을 담고 있는 자유로운 성격의 글이라 이름은 물론 사진까지 들어가며, 언론사의 입장과 다를 수도 있다. 실제로 미국 신문에는 진보 성향의 언론에 보수 논객의 칼럼도 종종 실린다고 한다.

그러나 앞에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걸릴 듯하다. 사설과 칼럼의 논조가 다르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보수 언론은 보수 칼럼만 싣고, 진보 언론은 진보 칼럼만 싣는다. 독자 역시 이렇게 한쪽만 보면 자기 생각만 옳다고 하기 십상이다. 나와 다른 주장을 만나면, 주장을 이끌어내는 논리적 추론을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고 ‘너는 어느 편이냐?’부터 따진다. 나 역시 그런 경향이 있었지만, 칼럼을 쓰다 보니 장관을 임명하거나 중요한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진보 언론과 보수 언론을 다 찾아보면서 합리적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렇게 양쪽 중 한쪽에 속하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정현종의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섬’이라는 짧은 시는 양극단을 극복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녹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 사이가 있었다. 그 / 사이에 있고 싶었다. //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박덕규의 시 ‘사이’ 전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준석은 탈당 선언문에서, 적장을 쓰러뜨리기 위한 극한 대립, 칼잡이의 아집이 우리 모두의 언어가 되어야 하느냐고 비판하며 신당 창당의 의지를 다지고 있고, 이낙연 역시 무능하고 부패한 거대양당이 극한 투쟁을 계속하는 현재의 양당 독점 정치구조를 깨야 한다며 창당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도전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중’이라는 말이 있듯이, 중간이란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절함’을 의미한다. 이들이 양극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면서 자기 이해에 연연하며 혐오 발언을 일삼거나 또 다른 편 가르기를 한다면, 국민들의 정치 피로감만 가중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중간이 제대로 자리잡으려면, 일상에서부터 내 의견만 옳다고 고집하지 말고 다른 의견을 경청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런 문화를 만드는 데 무엇보다 언론의 역할이 막중하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조롱을 듣지 않도록 언론이 극단적 보도를 지양하고 다른 의견을 허용하면 ‘사이’는 더 빨리 좁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