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영 수필가
정미영 수필가

장미 문양 찻잔에 돋을볕이 잠겼는가. 갑진년 새해를 맞아 태양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 홍차를 우려내는 중이다. 찻물을 한 모금 머금고 있으니, 인생의 행복이 별건가? 마음이 따뜻해진다.

라비앙로즈 커피잔세트를 생일선물로 받았다. 트위그 뉴욕 디자이너 몰리 해치와 테라로사의 콜라보레이션 작품으로 한국도자기에서 만들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도예가의 고풍스러운 작품을 집에서 혼자 보는 멋이란, 나만 감상하기 위해 아무도 없는 시간에 도자기 전시관을 방문한 듯 설레는 맛이 있었다.

라비앙로즈는 장밋빛인생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요즘은 가수 아이즈원의 노래로 유명하지만, 에디트 피아프가 1947년에 부른 샹송 제목으로 먼저 알려져 있다. 2007년에는 올리비에 다한 감독이 그녀의 일생을 담아 영화 ‘라비앙로즈’로 제작했다. 유년시절 거리에서 곡예를 하다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중에는 스타가 되어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계속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그녀였다. 영화에서는 그녀의 성공보다 어두운 아픔이 더 시각적으로 다가와 보는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나는 순간 깨달았다. 장밋빛 인생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대부분 장밋빛인생의 아름다운 면만을 꿈꾼다. 화려한 꽃과 향기를 품고 꽃길만 걷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그러나 향기와 가시를 동시에 지닌 장미의 속성처럼 우리네 삶에는 야속하게도, 최승자 시인의 ‘나날’에 나오는 애매와 모호가 일란성 쌍둥이처럼 싸우며 죽어 갔다는 시구처럼 행복과 불행 또한 일란성 쌍둥이처럼 엎치락뒤치락하는 것 같다.

나 또한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겪은 적이 있다. 상견례를 하면서 기분 좋으셨던 양가 부모님들께서 곧바로 마주 앉은자리에서 결혼 날짜를 잡을 때까지는 앞으로 장밋빛 인생 중 행복만이 보장된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친정아버지께서 공무수행 중 돌아가셨다. 호사다마! 그렇다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인생의 부정적인 면을 두려워해 집안에만 갇혀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 나만의 긍정적인 면을 가득 채울 수 있도록 힘차게 길을 나서야 옳은 일임에랴.

그런 이유로 나는 어쩌다 한 번씩 카페에서 콜라보레이션 작품을 살 때가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비싼 항공권을 구매해 전시회를 찾아가지 않아도, 동네 카페에서 외국으로 여행나간 사람처럼 기분 전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몇 년 전에는 서울에서 제임스 진을 만났다. 지금은 사라진 포항시청 옆 엔제리너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제임스 진의 대표작인 ‘아우렐리안즈(Aurelians)’를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머그컵과 물병을 구입했다. 그는 세계적인 그래픽노블(만화와 소설의 중간형식을 취하는 작품) 회사인 미국의 DC코믹스 출신으로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을 오가며 만화와 회화가 결합된 독특한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고 있었다.

며칠 뒤, 롯데뮤지엄에서 ‘제임스 진, 끝없는 여정’ 전시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제임스 진과 엔제리너스 아트 콜라보레이션 기념이었다. 주말에 가족들과 도슨트 설명을 들으며 전시회를 둘러보다가 잠시 후에 제임스 진의 사인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에게 진짜 행운을 잡았다면서, 전시회 기간 중 딱 한 번 있는 사인회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제임스 진의 실물을 영접하다니! 당신의 작품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 먼 거리인 포항에서 왔다고 말했더니, 환하게 웃으며 우리 가족의 손에 들려 있던 협업 작품에 개별로 사인을 해주었다. 행복과 불행 사이에 행운이 숨어 있기에 우리네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홍차가 차갑게 식어 다시 찻물을 끓인다. 문득 에디트 피아프가 영화 마지막에 불렀던 ‘아니요,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가 떠오른다. 내 인생의 매 순간마다 그녀처럼 기쁨과 슬픔까지도 포용하여, 후회하지 않는 장밋빛 인생을 살았다고 말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