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귀자 수필가

아삭아삭 생오이를 씹는 맛,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하다. 어린이들이 천진스럽게 표현하는 언어들은 싱싱한 야채처럼 달고 신선하다. 게다가 까르르 웃음까지 섞어주면 별처럼 색도 되고 빛도 된다.

같은 밤길인데도 그 별빛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지듯 같은 말인데도 빛과 색에 따라 달리는 열매가 전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사람의 말마다 내는 빛이 있다. 밝고 맑은 말로 사람을 즐겁게도 하고 어두운 말, 탁한 말로 슬프게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눈부신 말로 빛의 샤워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 영적 에너지가 보고 듣는 사람을 압도하고 설득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나무들이 발갛게 노랗게 한데 어울려 터트리는 단풍들의 합창처럼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어도 시간의 결이 스며든 것처럼 익숙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오래 간을 맞춘 사이처럼 편안하고 배려하는 말 한 마디에는 가슴이 녹기 때문이다.

씨앗이 껍질을 벗어야 파릇한 새싹이 나오듯 친절한 말은 세상을 따뜻하고 평화롭게 만든다. 내가 먼저 친절을 베풀면 내 주변이 따뜻해지리라.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로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을 판단할 때는 가장 먼저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살피게 된다. 언어는 영혼, 부모의 영혼이 언어를 통해 아들딸들에게 전해진다. 말을 배울 적에 사랑을 배우면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가까이에 항상 예쁜 말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과는 자주 대화하고 싶고 자연히 연락도 잦다.

‘아’ 다르고 ‘어’ 다르듯 토씨 하나, 점 하나가 뜻을 바꾸는 것이 우리 말 아닌가. 토씨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점을 밖으로 찍으면 ‘나’가 되고, 안으로 찍으면 ‘너’가 되니까. ‘길이 있다’와 ‘길은 있다’도 품은 뜻이 다르듯, 조사 하나로 칭찬의 말이 되기도 하고 조롱의 말이 되기도 하지 않던가. ‘배가 고프냐’에서 ‘가’ 대신 ‘배는’ 이나 ‘배도’를 넣어 억양을 어디에 두느냐를 살펴보면 의미가 극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평생 우리말과 글을 쓰면서도 토씨 하나를 왜 알맞게 쓰지 못하고 오랫동안 어색하게 잘못 쓰고 있는가.

무슨 말을 하고, 또 무엇을 하는지 유심히 보면 그가 타인에게 인색하고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인지도 그 사람의 말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말을 지킨다는 뜻이고 말을 행동으로 옮겨 언행일치를 보이는 것. 약속은 그 사람의 삶의 태도뿐만 아니라 믿음과 신용의 수준도 드러내므로. 말로 한 약속을 지키는지 아닌지 하나만 봐도 그의 모든 것을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이유이리라.

즐거움도 근육이 필요하듯 입말에도 맛이 있다. 단맛과 쓴맛, 상한 맛과 싱싱한 맛. 오묘하고도 질감 넘치는 언어의 맛에 울고 웃는다. 아프지 않다는 ‘통즉불통’이 소통 감수성에도 적용되는 말 같다. 아무리 찾아봐도 돈 안 들고 힘들이지 않으면서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건 역시 말이 아닌가.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감정들은 말에서 나와 삶의 나침반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먼 타국에서도 반겨주거나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게 엄지 척과 웃음 한 스푼이면 족하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만국 공통어는 웃음, 말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말임을 여러 곳에서 실감했기 때문이다. 흔히 말은 씨가 된다고 한다. 그 씨라는 말을 화분에 심어 가꾸고 싶다. 물 주고 거름 주며 비바람에 뿌리가 뽑히지 않도록 가꿔 모난 목소리를 깎아내면, 화음을 이루며 살며시 다가와 우리의 뺨을 어루만져주지 않을까.

위대한 책은 행간이 넓은 책이라던가. 그런 책은 여백이 있고, 글이 곧 그림 같다는 느낌을 준다. 사람도 나이가 들고 삶의 지혜가 쌓여가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행간이 이윽고 보일 때가 있다. 여백도 생긴다. 새해엔 말에도 행간을 넣고 여백엔 웃음을 버무려 말이 필요 없는 말 웃음으로, 말맛을 차지게 살려봄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