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미래의 불행을 막기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할 것인가? /Pixabay

EBS에서 제작한 ‘대학입시의 진실’은 한국의 대학입시 제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교육다큐멘터리이다. 총 6부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에서는 종종 다른 나라의 제도와 문화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5부에서 일본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방식이 흥미롭다. 해당 장면에서는 일본의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한 ‘격차사회’라는 현상을 다룬다. 2008년 리먼 사태 이후 회자되기 시작한 이 용어는 부모의 학력과 연수입이 자녀에게 유전되는 상관관계를 표현한 단어이다. 평균적으로는 사립대학 루트를 밟은 부잣집 아이와 공립교육 루트를 밟은 가난한 아이의 교육비가 3배 가까운 차이가 나는데, 이는 부모의 경제적 계층이 아이에게 세습되는 현상으로 직결된다.

계층 이동의 통로가 막히면 사회의 역동성이 감소하고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다. 이는 자녀의 인식 수준에서 보다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성공에 대한 자신감에 있어 상속부자 자녀의 경우 47.3%가 긍정 응답을 한 반면, 비정규직2세의 자녀들은 9.4%만이 긍정 응답을 하였으며, 노력의 보상에 대한 믿음 역시 계층에 따라 각기 61.4%와 26.8%로 집계되었다. 가난의 책임에 대해서도 상속부자 자녀들은 52.2%가 개인의 책임이라 응답한 반면, 비정규직2세의 자녀들은 9.8%만이 개인의 책임이라 응답하였다. 기회의 평등에 대해서도 상속부자의 74.1%는 긍정응답을 한 반면, 비정규직2세의 자녀들은 단지 23.2%만이 긍정응답을 하였다. 조금의 추상화를 거쳐 말하자면, 계층에 따라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흥미롭다고 느낀 건 이와 같은 부분만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사회가 불평등할 수밖에 없으며, 어떤 제도도 모두에게 공정하게 작동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흥미를 느낀 건,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택한 일본 니트족의 사례이다. 프로그램에서는 나다 요시후미라는 자발적 니트족의 사례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수입이 없음에도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한 달 100만원 가량의 생활비로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최소한의 생활을 하는 그는 미래 대신 지금의 행복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낮에는 파친코, 밤에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하는 그는 남는 시간에는 자신이 가보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을 해보며 시간을 보낸다.

비록 수입도 없고 생활도 궁핍하지만 자신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그가 말하는 행복의 비결은 ‘3주 이후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기에 그 이상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싫은 일이나 힘든 일은 하나도 하지 않기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꽤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저렇게 사는 것이 정말 좋은 삶인가? 불안하진 않은가? 그런 여러 종류의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놨기 때문이다. 만약 중병에 걸린다면? 혹은 사고를 당한다면? 그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신에게 불쑥 찾아든 불행에 그는 과연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어떤 재난과 불행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을 그의 삶을 바라보며 나는 그가 내심 한심하다고, 혹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어쩌면 그는 자신의 현실에 가장 책임감 있는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먼 미래에 찾아올지 모르는 불행을 막기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 책임감 있는 삶인 것일까? 어쩌면 내심 나는 나의 삶의 상시적인 불행에 대한 보상을 그의 삶에 대한 힐난으로부터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내심 그의 삶이 나보다 불행해지길 바라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라도 나의 삶을,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솔직해지자면, 나는 어느새 그에게 재난과 불행이 닥쳐오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현재를 긍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상하지, 그의 삶이 불행해지는 것과 나의 삶이 행복해지는 건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는 행복의 조건을 찾아낸 것이고 그것에 맞춰 삶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나는 왜 그의 불행을 바라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문제는 행복의 조건도 삶의 방향도 선택하지 못한 ‘나’의 문제인 건 아닐까?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불행을 바라는 나의 모습이 문득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