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수도암·서진문화유산 ‘수도암 신라비 학술회의’

김천 수도암에서 2019년 발견된 신라 비석을 재조명하는 학술회의가 ‘김천 수도암의 불교문화재와 신라비의 새로운 발견’을 주제로 최근 김천시립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열렸다. /서진문화유산 제공

수도산(해발 1천317m) 정상 아래 해발 1천m 지점에 위치한 수도암은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김천 직지사 말사인 청암사 부속 암자다. 하지만, 한때는 위세를 떨친 산중 사찰로, 그때의 영광은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과 동·서 삼층석탑을 비롯한 많은 성보문화재가 증언한다.

남쪽 너머로 가야산 주봉 상왕봉(해발 1천430m)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창주도선국사(刱主道詵國師)’라는 6글자를 큼지막하게 새긴 대강 사각형 기둥 가까운 석주 하나가 서 있다. ‘이 절을 개창한 사람은 도선국사다’ 이런 뜻이다.

그런데 이 돌이 본래는 적지 않은 글자를 빼곡히 새긴 신라시대 비석이었다는 사실이 지난 2016년 11월 중순 무렵, 보존 처리를 맡았던 김선덕 서진문화유산 소장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글자 흔적을 확인한 김 소장이 그 내용을 당시 위덕대 박홍국 박물관장(현재 위덕대 명예교수)에게 제보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창주도선국사’ 6자 새겨진 석주

사실 190자 적힌 신라비 밝혀져

김천시립도서관서 전문가 모여

한국 고대 금석문 의미 집중탐구

경북도 문화유산 지정 신청 통해

소중한 역사교육 자료 활용 계획

여러 차례 단독 혹은 여러 전문가와 현장 조사와 탁본 조사를 거친 박 관장은 본래 이 비석에는 190자 정도가 새겨졌음을 밝혀낸다. ‘창주도선국사’라는 글자를 새기는 과정에서, 그리고 장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글자가 지워지거나 판독 불명으로 빠졌지만 ‘毗盧遮那佛(비로자나불)’, ‘元和三年(원화3년)’, ‘金生書(김생서)’와 같은 구절을 확인해 공개했다.

김천시와 수도암, 서진문화유산이 최근 김천시립도서관에서 개최한 ‘2023년 김천 수도암 신라비 학술회의’는 한국 고대 금석문으로서는 이 비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집중 탐구한 자리였다.

먼저 김정원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이 수도암의 역사와 불교 문화재 현황을 짚었다. 그다음, 신라비 공식 보고자인 박홍국 위덕대 명예교수가 이 신라비 조사 과정과 그것이 김생의 필적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발표를 했고, 박남수 동국대 선임연구원이 이 비석 건립의 배경 탐구 결과를 설명했다.

가장 주목할 발표는 기존 판독을 보완하고 새로운 글자를 보강한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박남수 연구원의 연구 성과였다. 그는 탁본과 정밀 사진 촬영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이전에 보고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원화3년무자3월(元和三年戊子三月)’, 김생서(金生書)와 같은 구절에 더해 ‘진적(眞蹟)’이라는 글자를 비롯해 ‘불흥산(佛興山)’, ‘죽산(竹山)’, ‘밀연감□□(密演甘□□)’, ‘항중방당(斻中方啺)’, ‘고김□충(考金□冲)’, ‘금88푼(金八十八分)’, ‘임인개기(壬寅開基)’ 등의 글자를 새로 판독했다고 공개했다.

 

김천 수도암 신라비.   /서진문화유산 제공
김천 수도암 신라비. /서진문화유산 제공

이를 토대로 그는 이 비석이 기록한 내용은 대체로 “본 수도암이 있는 불흥산(수도산의 옛 이름)에 비로자나불이 나투는 진적이 있었고, 여기에 두 명의 큰 스님이 불법을 강설하다 죽산에서 중국으로 떠났다가 되돌아왔다. 이에 고 김□충을 위해 금 88푼을 기부하여 비로자나불상을 조영하였는데, 본 사찰은 임인년(762)에 개창하였고, 원화 8년(808)에 비로자나불을 만들었다. 이러한 연기와 사적을 김생의 글씨로 본 비명을 새겼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나아가 762년에 개창한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 조상을 만들도록 돈을 댄 사람은 금 88푼을 기부할 정도로 재력을 갖춘 김씨 성의 진골 귀족으로 인정되며, 불흥산에서의 비로자나불 출현이라는 진적에 힘입어 수도암을 돌아가신 아버지 김□충(考金□冲)이 모시는 원찰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홍국 명예교수는 2019년 발표를 보강하는 관점에서 시종 이 비석이 신라 명필 김생(711∼?) 친필임을 주장하는 논거를 보강하고자 했다. 이를 증명하고자 기존에 김생 친필이라 알려진 금석문들을 비교하고, 나아가 그의 글씨를 집자(集字)했다는 자료들도 분석했다.

박 명예교수의 발표에서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이 비석을 원화 8년(808)에 김생이 직접 쓴 비석이라 했을 때,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김생 출생연대 711년과 어떻게 합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수도암의 신라비를 세울 때 김생은 백수에 가깝게 된다.

이때까지 김생이 살아있을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백수 노인이 글씨를 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에 대해 박 명예교수는 삼국사기가 말하는 김생 출생연대는 믿을 수 없고, 그의 출생연대는 그보다 뒷 시기로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서 종합토론에서 여러 의견이 오갔다.

‘김천 수도암의 불교문화재와 신라비의 새로운 발견’ 학술회의 기념촬영 모습. /서진문화유산 제공
‘김천 수도암의 불교문화재와 신라비의 새로운 발견’ 학술회의 기념촬영 모습. /서진문화유산 제공

미술사 관점에서 수도암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도 주요 논점이었다. 절에 남은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과 삼층석탑을 비롯한 여러 성보문화재를 탐구한 김정원 연구원은 수도암 역사를 조망할 때 가야산 해인사와의 관계 설정이 특히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간단히 말해 가야산 해인사 문화권이라는 관점에서 수도암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발표들을 토대로 좌장을 맡은 김창겸 김천대 특임교수가 진행한 종합토론에는 박방룡 전 국립공주·부여박물관장, 이완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황이연 박사,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이 참여해 심도 있는 의견을 나눴다.

김선덕 서진문화유산소장은 “김천시에서는 이처럼 중요한 수도암 신라비에 대한 정밀 조사와 분석을 거친 후에 경상북도 문화유산 지정을 신청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번 학술회의를 계기로 김천지역 내 더 많은 다양한 문화유산을 발굴 보존하고, 나아가 주민들과 함께 소중한 역사교육과 문화관광자료로 활용할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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