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겨울인데 한낮 기온이 18℃까지 올라간다. 이래도 괜찮은가, 생각하며 커피나무를 마당에 내놓고 화분에 흙을 북돋우고 한껏 물을 준다. 일주일 내내 거실에 있어서 답답하기도 한 것처럼 너른 이파리를 한껏 흔들어댄다. 커피나무는 그나마 운이 좋아 잠시나마 밖에서 외기(外氣)와 만나는 행운을 누리지만, 거대한 덩치의 길상천은 꼼짝할 수 없다. 남들보다 크고 무겁다는 게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닌 셈이다.

얼마간 미뤄둔 마당 정리를 마치고 훌훌 들로 나선다. 어느새 다가온 해거름이어서 멀리 서녘으로 길지 않은 겨울 해가 꼴깍, 소리 내고 사라지고 있다. 여름의 태양은 오래도록 하늘가에 흔적을 남기는데, 겨울 햇빛은 인색하다 못해 심술궂은 느낌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천체의 작동과 운동에 인간의 의지나 바람이 개입할 여지는 없으니 군소리 없이 바라보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

따사로운 햇살과 달리 사납게 몰아닥치는 바람이 목덜미에 선선한 흔적을 남긴 후에야 미뤄둔 문제가 머리를 쳐든다.

‘그대 마음은 어디 있는가?’ 가슴인가, 머리인가, 육신 어느 다른 곳인가! 어느 양자물리학자는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육신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뇌에 고작 0.0001%의 마음이 있을 뿐, 나머지 99.999%의 마음은 우리의 육신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아니,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탄식이 절로 나온다.

두 손을 휘휘 저으면서 바람 속을 걷다 속삭인다. 그래, 나의 마음아, 너는 지금 나의 육신과 함께 가고 있느냐?!

그렇다면 마음아, 너는 나의 앞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옆이냐, 위냐, 좌냐 우냐, 너의 위치를 알려다오. 하지만 나의 마음은 묵묵부답 고요하다. 마음은 그런 나의 질문이 귀찮은 것인지, 성에 차지 않아서 그런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상냥하게 다시 묻는다. 나의 마음아, 나와 대화하는 게 귀찮지는 않은 것이냐?!

그래도 마음은 대꾸하지 않는다. 이윽고 붉게 소멸해가는 햇살과 바람에 버티고 서서 태양과 작별하는 작은 구름장과 윙윙 소리 내며 질주하는 바람과 비어버린 들판과 대지의 수호신인 양 의연히 서 있는 전봇대를 사진기에 담는다. 세 장의 사진을 찍는 데 소요된 시간은 불과 10여 초, 하지만 사진에 담긴 풍경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그 사진을 찍는 나의 마음이 사진 영상에 비친 피사체인 겨울 풍경을 변화시킨 것이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나의 눈과 시각중추가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전권은 오직 마음이 가지고 있다. 마음이 어디를 어떻게 볼 것인지 결정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양자물리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가 ‘관찰자 효과’다. 전자는 인간이 관측하지 않으면 파동(波動)으로, 관측하면 입자(粒子) 형태로 ‘슬릿(slit)’을 통과하는 이른바 ‘이중 슬릿 실험’에서 나온 용어가 관찰자 효과다.

아주 미소한 입자인 전자가 관측 행위로 인해 빛의 영향을 받으면, 파동의 성질이 입자의 성질로 바뀌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나나 당신의 마음은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