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희 수필가
윤명희 수필가

책을 읽다가 예전에 본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박카스 할머니 얘기로만 치부했던 내용이 책 때문인지 다른 시각으로 다가온다. 노년에까지 성을 팔아야 살아가는 여자. 그녀는 자기만큼이나 늙은 집에 방 한 칸 세 들어 산다. 일수를 갚아야 할 만큼 빈곤한 살림살인데도 길고양이를 거두고, 말도 통하지 않는 코피노 아이까지 보살핀다. 이웃과 어울려 살아가는 그녀 뒤에 홀로 고단하게 살아가는 남자들의 삶이 보인다. 그들 속에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예순 중반에 혼자가 되었다. 사형선고 같은 병명을 들은 엄마는 당신이 먼 길을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 보다 혼자 남을 아버지를 걱정했다.

그는 안방 텔레비전 앞에서, 저녁밥을 준비하느라 바쁜 엄마에게 리모컨을 찾아달라고 하는 남자다. 양말이라는 말이 떨어지면 손수건까지 앞에 있어야 했고, 발 씻고 나오면 밥상이 차려져야했다. 인부들에게 줄 돈을 찾는 일도 엄마가 했다.

그런 아버지가 혼자된다는 것은 남은 가족들에게 부담이었다. 자식들에게 기대지 말라는 엄마의 유언 때문인지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떤 부탁도 하지 않았다. 당신의 일정에 맞춰 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안심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지나는 말로 죽는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 했다.

무슨 말씀이냐고 묻자, 그런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노라 했다. 엄마의 빈자리에 푸른곰팡이가 발을 뻗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서 술이 불콰해진 아버지는 베란다로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고 했다. 난간만 넘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은 벌써 뛰어내렸는데, 난간을 훔켜잡은 손이 당최 놓지를 않았다. 눈을 떴을 때는 술자리에 앉아있더라고 했다.

영화에서, 혼자 남은 노년의 생활은 길 잃은 삶처럼 보였다.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것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자는 돈으로 해결 할 수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하겠지만, 김치찌개 속의 고깃덩이를 건네며 잔소리하는 마누라가 있는 남자가 더 좋아 보였다.

화면에, 정신은 멀쩡한데 몸은 꼼짝 못하는 한 남자가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는 나무토막에 이불을 덮어 놓은 것 같다. 그는 문병 온 박카스 할머니에게 어렵사리 도움을 청한다. 먹으면 죽는 약을 입에 넣어달라고. 한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많은 생각이 오갔다. 남자의 손을 꼭 쥐어주는 그녀의 손이 대답했다.

두 번째 남자, 치매기가 있는 그는 아직은 본 정신일 때가 더 많다. 그는 입고 있는 색 바랜 러닝셔츠보다 더 비참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죽여 달라는 그 말은 도와 달라는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이 장면은 뭘까? 분명 친구와 셋이서 산을 올라왔는데 정상에서 친구는 먼저 산을 내려간다? 바위산에 그 남자와 여자만 남겨둔 채 말이다. 돈으로 성을 해결하듯이 바위산에서 밀어주는 것까지 바란다고? 평생을 돈 버는 일밖에 몰랐던 그들은 돈으로 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뿐인가?

혼자 죽지 못하는 남자가 또 있다. 먼저 산을 내려갔던 그 남자다. 아내의 제사를 지낸 다음날, 박카스 할머니를 찾은 남자. 성장을 한 그는 그녀와 성찬 앞에 마주 앉았다. 와인을 마시고 한껏 분위기에 젖은 그는 여자를 호텔방으로 들인다. 그는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있어 달라고 한다. 혼자 죽기가 너무 무섭고 외롭다는 것이다. 더는 외로움을 이길 자신이 없는 남자는 한 움큼의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었고, 여자의 입에도 한 알 넣어준다. 남자는 먼 길을 떠나고,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그 이후의 일들을 떠안아야했다. 그녀는 마지막 가는 남자들의 손을 잡아준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함께 할 누군가의 손이 간절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에는 혼자가 된다.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던 그녀의 뒷모습에 자꾸만 눈이 간다. 공원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녀의 하늘이 오늘따라 더 깨끗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