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미래’

임형남·노은주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인문

“김명관 고택, 선교장, 임리정, 설선당, 남간정사, 소쇄원, 운현궁, 도산서당…. 우리가 사랑한 옛집을 순례하다.”

건축가 부부인 임형남·노은주 씨가 최근 펴낸 ‘집의 미래’(인물과사상사)에는 우리가 사랑한 오래된 집들을 순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삶이 담긴 살림집과 자연에 스며들어 또 다른 자연이 된 사찰 등 한국의 대표적인 옛집 32군데를 순례하면서 미래의 집을 생각한다. 그 오래된 집들은 정지해 있어도 무척 강한 움직임이 있고, 경계를 넘나들며 독특한 경지를 이룬 우리의 문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제1부는 한국의 옛집을 순례한다. 산천재, 선교장, 임리정, 소수서원, 남간정사, 경복궁 등 우리의 옛집 15군데를 둘러본다. 제2부는 한국의 사찰을 순례한다. 화엄사, 통도사, 선운사, 실상사, 황룡사지, 미륵사지 등 우리의 사찰 17군데를 둘러본다.

‘산속에 하늘이 담긴 집’이라는 뜻인 산천재는 남명 조식(曺植)이 61세에 짓고 인생의 말년을 보낸 집이다. 지리산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은 처사로 살았던 조식은 학문적인 깊이와 높이를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대학자였다. 그는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고 밤에도 정신을 흐트러뜨린 적이 없었다. 명종이 그를 단성 현감에 임명하자, 사직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산천재는 그런 조식을 무척 닮았다. 절묘한 공간의 구성도 없고 아름다운 건물의 집합도 없고 우리의 옛집이 보여주는 다양한 마당조차 없다. 고수의 한 획처럼 지리산과 덕천강 사이에 한 점을 찍어놓은 것 같다.

김명관 고택은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라는 곳에 있는 집이다. 이 집은 따로 전해지는 당호는 없고, 김명관(金命寬)이 지은 집이라는 사실과 지은 지 약 240년이 됐다는 사실만이 전해진다. 김명관 고택은 칸수로 100여 칸으로서 보통 큰 집이 아니었다. 김명관 고택은 전형적인 호남 부잣집의 모양대로 여러 개의 건물이 자유롭게 분산되어 있는데, 그 공간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특히 안채의 시어머니 영역과 며느리 영역은 부엌과 방의 모양, 그 상부의 다락 등이 그림을 그리고 반을 접어 똑같이 찍어낸 것처럼 똑같다. 고부간에 서로 일정한 거리와 영역을 가지도록 한 것이다.

임리정은 우리나라 예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김장생(金長生)이 추구하는 삶과 닮은 집이다. ‘깊은 못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과 같이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이는 김장생이 평생 가슴에 품고 행동에 드리어 놓았던 인생의 지침이었던 ‘경(敬)’을 의미한다. 더욱이 임리정은 두드러지게 불끈 솟지도 않고 남들이 쉽게 내려다보지도 못하는 위치에 있다. 3칸 집, 가장 평범하지만 모든 선비가 마지막에 돌아간다는 ‘삼간지제(三間之制)’에 따른 집이다.

팔괘정은 김장생의 제자인 송시열(宋時烈)이 자신의 집을 우주 만물이 함축된 중심으로 보고 지은 집이다. 팔괘정이 임리정과 불과 15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송시열이 스승인 김장생 가까이에 있고자 한 마음을 담은 것이다.

식영정은 김성원(金成遠)이 그의 장인이며 스승인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집이다. ‘그림자가 쉬는 정자’라는 뜻이다. 임억령은 그림자를 ‘사람을 얽어매는 욕망이며 현상’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식영정은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며 그림자를 끊겠다는 의미의 집이다.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아주 작은 집이다. 높은 언덕에 있지만,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도산서원은 이황(李滉)이 57세 되던 해에 짓기 시작해 60세에 완성했다는 도산서당 일원에서 시작한다. 도산서당은 이황이 공부하는 공간과 제자를 가르치는 공간, 그사이에 수많은 책을 쌓아놓은 서가 공간과 부엌 공간으로 이루어진 4.5칸이라는 모호한 크기의 집이다. 이황은 항상 몸과 마음을 삼가며 바르게 하고, 사물의 이치를 탐구해 바른 지식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도산서당은 작지만 겸손하고 조용하며 경건하다. 여느 서원 건축과는 다른 자유로운 공간적 융통성이 드러나는 도산서원은 당시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 같다. 이황의 학문에 대한 자세와 제자를 대하는 방식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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