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가을은 ‘거울’이다. 청명한 하늘, 소슬한 바람, 낙엽 구르는 소리만큼 나를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은 없다. 가을에는 사람의 마음도 거울처럼 맑아진다. 내면의 정신세계로 인도하는 가을은 나와 마주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

가을의 고독과 외로움은 고요한 침잠과 사색을 가능하게 한다. 가을은 감상적 상념이 아니라 냉정한 성찰을 요구한다. 위대한 철인들이 품었던 질문을 나도 피해 갈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혁신함으로써 삶의 질적 수준을 높여나간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Hermann K. Hesse)는 “가을은 더 높은 삶으로 들어가는 계절”이라고 했다. 수준 높은 삶은 인간의 내면과 마주한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와 마주해야하는 이유는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고, 부르제(P. Bourget)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에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의 현실이 보여주듯이 정치꾼들이 만들어놓은 진영프레임에 갇히면 ‘사유의 정치’가 ‘믿음의 정치’로 전락한다. 광신도(狂信徒)가 된 정치팬덤들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고력이 약화되어 자기성찰이 불가능하다. 진영정치의 포로가 되어 화병(火病)에 걸린 사람들은 진영의 족쇄를 벗어던져야 그 병을 고칠 수 있다.

가을은 ‘비움의 철학’을 가르쳐준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구르는 소리는 세월이 가는 소리다. 가을은 ‘집착의 계절’이 아니라 ‘버림의 계절’이다. 인간은 탐욕과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소망하는 건강은 몸(육체)과 마음(정신)이 동행해야 하는데, 마음 챙김이 없는 육체의 건강은 공허할 뿐이다. 우리의 삶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온다.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는 가을의 가르침에서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가을은 ‘결실’과 ‘소멸’이라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결실의 풍요로움에 감사하는 것도 가을이며, 다가올 북풍한설을 염려하는 것도 가을이다. 가을은 오색단풍의 환희와 바람에 뒹구는 낙엽의 쓸쓸함이 공존하고 있다. 가을의 양면성은 나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나와 마주한다는 것은 나의 장점만이 아니라 부족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는 단점들까지도 솔직하게 보는 것이다. 가을의 투명한 거울에 비추어 현재의 나를 정확히 볼 수 있어야 미래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

가을에는 누구나 생각이 깊어진다. 구도자가 되어 자연의 섭리를 깨달음으로써 참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돈·권력·명예를 쫒아서 진흙탕 싸움에 휘둘리다보면 정작 중요한 내면의 정신세계를 살펴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청명한 가을 하늘에 비추어 맑은 영혼을 찾아내고, 소슬한 바람에 구르는 낙엽의 소리를 들으러 홀연히 떠나야 한다. 나를 만나러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