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통일신라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

통일신라의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한 통치자였으나, 동시에 가혹한 군주이기도 했던 신문왕의 유택.

무열왕 김춘추의 돌올한 외교 수완과 정치력, 무열왕의 손위 처남 김유신의 탁월한 전쟁 수행 능력과 상대를 압도하는 전략적 병법(兵法)을 앞세운 신라는 660년 황산벌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제를 병합했다.

이어 668년에는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 군대를 궤멸시키며 삼한일통(삼국통일)에 한 걸음 더 다가섰고, 문무왕 김법민의 집권 이후인 676년엔 당대 아시아 최강대국 당나라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온전한 통일국가의 형태를 갖춘다. 그리고, 삼국이 통일된 5년 후인 681년. 문무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위협하는 일본 해적들을 막아내는 용이 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붕어(崩御)한다.

문무왕의 아들이자 무열왕의 손자인 신문왕 김정명은 효자였다.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수용해 일본 도적들이 출몰하는 서라벌 바닷가에 문무왕의 뼈를 묻었다. 그리고, 인근에 완성한 사찰이 지금의 경주시 문무대왕면에 자리한 감은사(感恩寺)다.

 

신문왕 집권 초 “왕권 강화” 대의명분 내세워 장인 처형 등 처가 풍비박산
지방귀족 등 권력 빼앗아 중앙으로 집중… 권력 쟁취 걸림돌땐 모두 죽여

◆통일 이후 최대 과제는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왕권 공고화

7세기 후반 이처럼 새롭게 재정비된 신라 통일왕조의 제1과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지방 귀족들에게도 나눠주었던 권력을 빼앗아 중앙으로 집중시키고, 통일 왕조 군주의 권력을 최대치로 강화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자신 앞에 놓인 권력과 돈을 “저는 관심 없어요. 제가 가졌던 권력이건 돈이건 모두 가져가세요”라며 쉽사리 허락할 이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남들이 가진 권력을 자신 앞으로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강제력과 희생양이 필요한 법. 신문왕 김정명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신문왕 집권 초기엔 한 차례 거센 피바람이 불어닥친다. 수많은 이들이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다. 특히 처가가 풍비박산(風飛雹散) 났다.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의 책 ‘인물한국사’엔 이와 관련된 서술이 등장한다. 다소 끔찍하기까지 한 내용이다.

“신문왕은 냉정하면서도 판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그는 즉위한지 한 달 만에 반란 모의죄로 소판(蘇判) 김흠돌, 파진찬(波珍湌) 흥원, 대아찬(大阿湌) 진공 등을 처형했다. 놀랍게도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었다. 김흠돌은 661년 6월 김유신을 도와 고구려 공격에 참여했고, 668년엔 대당총관 자격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해 그 공으로 고위 공직인 소판에 올랐다. 흥원과 진공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신문왕은 김흠돌을 처형한 지 8일 후에 그들을 참수한 이유를 발표했다. 김흠돌 등이 사악한 자를 끌어들이고 궁중의 내시들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 이어 얼마 후에는 이찬(伊湌) 군관의 목을 베었다. 신문왕은 그가 김흠돌이 반역할 것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하고, 그의 장남까지 자살해 죽게 만들었다.”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인어른”이라 부르던 사람에게도 가차없었던 게 신문왕. 아내가 슬픔 속에서 흘릴 눈물은 ‘통일된 국가의 왕권 강화’라는 대의명분 아래 무시됐다.

◆중국과 일본, 조선왕조에서도 권력 독점을 위한 희생이…

그런데, 권력의 독점과 강화를 위해 친족이나 처족을 죽인 사례는 비단 신문왕 통치 시기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

우리와 가까운 나라 일본과 중국, 신라와 고려왕조 이후 등장했던 조선에서도 그런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에 이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시대. 그 카리스마가 수백 년 세월을 넘어 아직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권력을 나눠달라” 요구하는 동생의 목을 잘라버린다. 같은 시대 또 다른 다이묘(大名·중세 일본의 봉건 영주) 하나는 인근 지역 다이묘에게 생포된 아버지를 어렵게 빼내 와서는 죽여버린다. “늙은이가 바보 같이 사로잡혀 내 권력 쟁취 가도에 걸림돌이 될 뻔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무시무시하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의 시황(始皇)은 친모가 ‘노애’라는 사내와 밀통해 낳은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머니를 찾아가 “다시는 임신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수십 차례 배를 걷어찬다.

씨가 다른 젖먹이 동생은 가죽부대에 넣어 돌바닥에 패대기쳐 죽인다. 생후 몇 개월도 되지 않은 아기를. 그 젖먹이가 커서 자신이 독점한 권력을 찬탈할 걸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중국 고서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 역시 잔인하기 짝이 없다.

초나라 항우와 권력을 다투던 유방은 “당신 아버지가 포로가 됐다. 항우가 그를 끓는 물에 삶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잘 삶기면 다리 하나 얻어먹으면 되겠네”라며 외면했다.

이 일이 있기 몇 해 전에는 적군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마차가 무거워 속도가 나지 않는다”며 함께 탄 아들을 발길질해 마차 아래로 떨어뜨린 사람이 유방이다. 왕이 되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는 혈족의 인연까지 잘라버린 것이다. 결국 유방은 한나라의 제1대 황제가 됐다.

일본이나 중국까지 갈 것도 없다. 조선 건국 초기. 태종 이방원은 이복동생 이방석을 쇠몽둥이로 때려죽였고,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집권한 세조 이유(李瑈)는 16세 어린 조카 단종 이홍위(李弘暐)의 목에 밧줄을 걸어 죽였다.

조선이 기틀을 잡아가던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반까지 왕들은 수많은 처가 사람들을 참수하고, 입에 사약을 퍼부었다. 이를 ‘살육의 역사’라 부르는 건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닐 터. 모두 권력을 쟁취해 독점하고,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경주시 봉길리 바닷가에서 신문왕이 극진히 섬겼던 아버지 문무왕의 수중릉을 바라보고 있는 여행자.
경주시 봉길리 바닷가에서 신문왕이 극진히 섬겼던 아버지 문무왕의 수중릉을 바라보고 있는 여행자.

◆통일신라의 위엄과 권위를 위해 첫 아내 내치고, 새 아내 맞아

신문왕이 신라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른 건 겨우 열여섯 살 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병약하고 왜소했다고 알려진 그는 오래 살지도 못했다. 스물일곱에 사망했으니. 그러니, 집권 기간은 겨우 11년이다.

그럼에도 신문왕은 괄목할 만한 정치·사회적 개혁을 주도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는 신문왕 김정명의 통치 당시 행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문왕은 지방 조직 정비와 지방 통치제도를 확립했으며, 전국을 9주5소경으로 나누고 행정조직을 강화했다. 청주에 서원경(西原京)을 설치하고 달구벌로 수도 이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687년 5월엔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했고, 689년 1월에는 귀족에게서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해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킴으로써 왕권의 전제화를 이뤘다.”

21세기인 요즘이라면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며 취직을 고민할 나이에 불과한 10~20대에 위와 같은 일을 해냈다면 신문왕은 ‘워커홀릭(Workaholic)’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런 그가 장인을 죽이고, 아들을 낳지 못한 아내를 궁궐 밖으로 내치고, 전처(前妻) 보란 듯이 새로운 아내를 성대한 혼인식 속에 맞아들인 냉혈한의 모습을 보인 것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인물한국사’를 다시 살펴본다.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략) 신문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의 저항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 첫째가 외척의 발호를 막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막강한 권력을 가진 김흠돌을 제거하고 배후 세력이 없는 여성을 왕비로 새로 맞이했다. 신문왕은 김씨 왕후를 쫓아낸 지 2년 후인 683년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후로 삼기로 하고 폐백 15수레, 쌀, 기름 등 135수레, 벼 15수레를 보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5월 7일 그녀를 부인으로 책봉하고, 여러 대신들을 보내 그녀를 맞이하게 했다. 수레에 탄 그녀 곁에 시종하는 관원들의 숫자가 엄청났다. 이런 성대한 결혼식은 처가가 대단한 세력가였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결혼을 최대한 이용해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랬다. 바로 ‘왕실의 위엄’, 넓게 해석하면 통일왕국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왕권의 공고화(鞏固化)를 위해 처가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이는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의 찬란한 빛 아래 숨겨진 또 하나의 ‘어두운 그림자’ 같은 역사가 아닐까.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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