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신라, 자유분방한 성 문화가 음란은 아니었다

삼한일통의 일등공신 김유신과 기생 천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하는 천관사지(天官寺址).

신라는 국가를 향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시하는 사회였다. 신하가 왕에게 지켜야 할 신의(信義)도 화랑을 포함한 신라 귀족청년들이 교육받은 주요 덕목이다. 그건 통일 이전과 이후가 동일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성(性)문화는 매우 자유로웠다고 추정된다. 오히려 1천여 년 전 신라 사람들이 21세기를 사는 지금의 우리보다 더 큰 성적 자유를 누렸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다.

수원과학대 교양학부 류선무 교수의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 결론 부분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

“신라시대는 모든 면에서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된 단계였다. 남녀의 애정 윤리와 성 풍속도 남녀 동등하게 자유와 개방 정신 그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처용가(處容歌)’였다. 성적 욕구의 표현과 행위는 남녀가 서로 존중하는 풍조였다. ‘화랑세기’에서 미실은 세종전군, 사촌 오빠 사다함,진홍왕,진흥왕의 아들 동륜과 금륜,설원랑,자기 동생 미생 등과 혼인 및 사통하며 난음 행각을 펼치지만 그것이 윤리·도덕적으로 지탄을 받는 죄악이 아니었다.”

 

“신라시대는 모든 면에서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된 단계였다. 남녀의 애정 윤리와 성 풍속도 남녀 동등하게 자유와 개방 정신 그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처용가(處容歌)’였다”

“왕실이나 상류사회에서는 권력과 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족내혼(族內婚)이 일반적인 혼인의 형태였다”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 중에서

◆오늘날의 도덕적 잣대로 신라 성 풍속 해석하면 곤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해 삼한일통(삼국통일)의 토대를 거의 완성한 7세기 중반 이후에도 위와 같은 성 풍속은 이어졌다.

‘삼한일통의 양대 거두(巨頭)’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김춘추는 친자매 둘 모두를 아내로 삼았고, 김유신은 여동생의 딸, 즉 조카를 두 번째 아내로 맞는다. 그것도 회갑을 넘긴 나이에.

앞서 언급된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에서도 이를 아래처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김유신의 동생인) 문희는 언니 보희로부터 상서로운 꿈을 사고 김춘추와 혼인해 딸 지소를 얻게 되고, 지소는 당시 외삼촌인 김유신과 혼인했다. 또한, 언니인 보희도 뒤에 김춘추의 후궁이 된다. 자매가 한 남자의 부인이 된 것이다. 삼촌과 조카딸, 고모와 친정 조카,외삼촌과 생질녀 등 친족관계 속에 중복된 혼인 관계로 짜여진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럴 사람이야 없겠지만, 1천 년 전 이런 풍속만을 보고 “신라는 성적으로 몹시 문란한 나라”였다고 말하는 건 너무나 단순한 해석이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 사회의 근친혼은 성적인 문제가 아닌 ‘권력의 독점과 지속적 유지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역할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

그러니, 삼국통일이라는 당대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의 희생과 피땀을 ‘성적인 문제’ 하나만으로 폄하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류선무 교수의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 또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신라의 남녀는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 강제적인 성폭력이나 강간 등의 성범죄는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왕실이나 상류사회에서는 권력과 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족내혼(族內婚)이 일반적인 혼인의 형태였다. 어느 시대, 어떤 사회의 결혼제도나 가족의 형태, 성 풍속이 도덕적이냐 또는 야만적이냐, 문명적이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권리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존중되는 가운데 각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성적 에너지가 발산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의 기계적이고, 상업적이고, 신경쇠약적인 병든 성 문화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건전하고 건강한 성 문화의 형성은 현대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크나 큰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경주시 배반동엔 무열왕의 손자이자, 문무왕의 아들인 ‘효자’ 신문왕의 유택이 자리해 있다. 신문왕릉이다.
경주시 배반동엔 무열왕의 손자이자, 문무왕의 아들인 ‘효자’ 신문왕의 유택이 자리해 있다. 신문왕릉이다.

◆아버지 뜻을 받드는데 최선을 다한 신라의 통치자들

대부분의 고대 역사는 통치자와 세칭 ‘영웅’ 중심으로 기술된다. 그러니, 신라의 보통 사람들이 효(孝)에 관해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했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다만, 구전되는 설화나 전설을 들어보면 왕이나 귀족이 아닌 평민들 역시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사람을 칭송했다는 건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의 왕들은 대부분이 효자였다. 결국은 왕도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자식이니까 효를 인간 행위의 근본이라 믿었던 것이다. ‘논어’ 학이편(學而篇)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부재(父在)에 관기지(觀其志)하고, 부몰(父沒)에 관기행(觀其行)하라. 삼년(三年)을 무개어부지도(無改於不之道)라야 가위효의(可謂孝矣)니라.

이를 현대식으로 풀어 쓰면 대략 이런 뜻이 될 터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그의 뜻을 따르고, 돌아가신 후에는 그의 행적을 살펴라. 그런 행위가 최소 3년은 지속돼야 그게 효의 시작이다.’

이젠 앞서 이야기한 신라의 자유로운 성문화와는 다른 이야기다. 통일신라의 기틀이 닦이던 7세기 중후반 나라를 다스렸던 신라 왕들은 선왕(先王)인 아버지에게 효를 다했다.

문무왕 김법민은 딸과 사위의 비극적인 죽음을 겪으면서도 삼한일통의 의지를 꺾지 않았던 아버지 무열왕의 뜻을 받들어 고구려 병합과 당나라 축출이라는 삼국통일의 마지막 숙제를 해결했다.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 김정명은 “사후(死後)에도 용이 돼 일본 해적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겠다”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문무왕을 바다에 장사 지냈다.

또한, 조부 무열왕과 부친 문무왕이 이뤄놓은 삼국통일의 기반 위에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것도 신문왕이다.

이 같은 문무왕과 신문왕의 행위를 ‘관기지(觀其志)와 관기행(觀其行)’이라 부르지 않으면 어떤 걸 그리 칭할 수 있을까.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통일신라 시기 2-불교문화’엔 핏줄로 이어진 바로 이 3명의 왕, 무열왕·문무왕·신문왕의 주요 행적이 짤막하게 요약돼 있다. 아래 그대로 옮긴다.

“대왕암은 경북 경주시 양북면 앞바다에 있는데,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물리쳐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그리고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었으므로, 아들인 신문왕이 재위 2년(682년)에 사원을 완성해 감은사라 했다. 문무왕은 평소에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돼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해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바로 대왕암이었다. 감은사 금당 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하는데, 실제 발굴조사에서 그 흔적을 발견했다.”

◆조부와 부친에 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신문왕이지만...

신라는 물론,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왕조를 통틀어도 빼어나고 돌올한 업적을 남긴 임금으로 평가받는 게 신문왕의 할아버지(무열왕)와 아버지(문무왕)다. 그런 이유에선지 학계에서도 신문왕에 대한 평가는 조부와 부친에 비해 인색하다. 하지만, 통일신라 초기 신문왕이 진행했던 굵직굵직한 문화예술 프로젝트와 권력의 중앙 집중을 위한 노력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성격의 것들이 분명 아니었다.

고대사 연구자 김용만의 ‘인물한국사’는 신문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681년 7월 1일 삼국통일의 영웅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고, 16년간 태자 자리에 있던 정명이 왕위에 올라 신문왕이 됐다. 신문왕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던, 냉정하면서도 판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그 시대 신문왕이 맡아야 했던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고문헌에 의하면 그는 삼국통일 직후 통치 기반을 단단하게 구축하고, 귀족들의 노동력 징발권도 과감하게 회수함으로써 고대 국가의 왕이 가져야 할 권위를 강화하고, 행정구역도 정비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3대를 지목해 “잘난 할아버지에 더 잘난 아버지, 그리고 만만찮은 손자”라고 표현하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닌 듯하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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