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보다 늦어지는 경북서북부 1년 수확기 맞춰 ‘구(九) 겹친 날’ 차례 지낸 풍습 이어
충효당 등 아랫집서 시작, 윗대로 올라가며 4대 고조부 모시는 대종가 양진당서 마무리
간단한 차례상에 술안주 ‘적(炙)은 날것으로 준비… 하회마을 곳곳서 다양한 행사도

안동 하회마을 전경

오는 29일은 ‘추석’ 명절이다. 한가위·가위·가윗날·가배일(嘉俳日)·중추절 등으로도 불리는 8월 보름 ‘추석’은 ‘설’과 함께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로도 손꼽힌다.

각 가정은 추석날 아침 햇곡으로 빚은 송편과 각종 음식을 차려놓고 조상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추석 전에 산소를 찾아 미리 벌초를 해 두기도 한다. 그럼에도 현재 명절의 모습은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핵가족화로 급속하게 쇠락했다. 여기에 2019년 발생한 코로나19는 명절 예법을 간소화하거나 폐지시켰다.

우리나라에서 유교 사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안동을 비롯한 경북의 종가나 종택에서 조차 예법들이 간소화 됐다. 일부에서는 코로나19로 명절 차례에 참석하지 못하자 영상으로 절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방법 등도 동원됐다. 우리 명절의 모습이 변한 것을 넘어 사라진 것이다.

 

맷돌 돌리기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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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올해는 사정이 좀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그동안 전염병으로 고향을 찾지 못한 분들이 고향을 찾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10월 2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연휴가 6일로 늘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친지들을 만나고 함께 차례도 지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추석에 “해외 여행이나 다녀 오라”는 명문 종가가 있다, 그것도 유교 사상이 가장 강하다는 안동에.

추석을 그저 빨간날이 이어져 있는 날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곳은 바로 ‘하회마을’ 풍산 류씨 집안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 15대 류창해(67) 종손은 “우리 집안에서 추석은 해외여행을 가는 등 부담 없이 쉬는 기간”이라며 “각 집안 사정에 맞춰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회마을이 특이하게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 것은 ‘중양절’에 차례를 올리기 때문이다. ‘중양절’은 9월 초아흐레 중구를 말하는 것으로, 숫자에서 홀수를 양수(陽數), 짝수를 음수(陰數)로 치는데 중양(重陽)이란 홀수인 양이 겹쳤다는 뜻이다.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이 모두 중일명절(重日名節)로 길일이다.

 

선비문화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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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중구라는 말은 양수인 구(九)가 겹친 날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구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널리 행해졌다고 전한다. 숫자 ‘9’는 하늘과 임금을 상징하는 수로, 옛날 중국에서는 하늘의 제일 높은 곳을 구중천이라 일컬었으며, 땅이 아홉 개의 주로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또한, 9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숫자여서 일반 백성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중구는 임금을 상징하는 9자가 겹치는 날로서 양기가 센 날로 예로부터 경사스러운 날로 여겼다. 고려시대에 중구는 원단(설), 상원(대보름), 상사(삼짇날), 한식, 단오, 추석, 팔관, 동지와 함께 9대 속절로서 큰 명절이었고, 차례의 명절이기도 했다.

‘풍류세시기(風流歲時記)’에는 ‘경북지방의 서북부지역에서는 1년 수확기가 추석 때보다는 아무래도 늦어지게 마련이어서 조령에 올리는 천신의 행제를 중양절에 가서야 올리게 되므로 이날이 곧 농공 추수감사제에 맞먹게 돼 명절답게 즐긴다고들 한다’고 기록돼 있다.

사실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부지역에서 추석날 차례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산업사회 전후로, 추석이 국가적인 공휴일이 되면서부터다. 경북 북부지역은 추석 무렵에 햅쌀이 나지 않으므로 중구를 앞두고 벼를 거두어 햅쌀로 만든 송편을 빚어 차례를 지낸 것이다. 현재도 하회마을에서는 중구 차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가훈쓰기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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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추석 때 햇곡식으로 차례를 드리지 못한 집에서는 중구에 차례를 다시 지냈고, 일부 산간 지방에서는 마을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기일을 모르는 조상의 제사나 연고자 없이 떠돌다 죽었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제사는 중구에 지내기도 한다.

중양절이 되면 하회마을은 온통 한복을 입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거기다 마을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2010년)된데다 워낙 유명한 안동의 관광지다 보니 다양한 프로그램도 펼쳐진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하회마을의 중양절을 사진에 담으려는 작가들로 붐빈다, 이에 각 집안에서는 코로나19가 있기 전에는 이들의 접근을 막는 금줄을 치기도 했다.

류한철 하회마을보존회 사무국장에 따르면 하회 류씨의 대종가인 양진당 차례는 늦게 시작된다. 충효당 등 아랫집에서 먼저 차례를 모신 다음, 대종가에 모여 차례를 지내야 많은 후손이 참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차(之次·맏이 이외의 자식들)들은 부모의 제사를 각 집에서 지내고, 돌아가신 분의 아버지가 속해 있던 큰집으로 가서 차례를 지낸다. 이후 점차 윗대로 올라가면서 차례를 지내다 고조부를 모시는 집에까지 이르면 그 집이 바로 종가다.

 

차례 지내는 풍산 류씨 종가 사람들
차례 지내는 풍산 류씨 종가 사람들

이날 양진당 안채에서는 문중 부인들이 모여 차례 음식을 차린다. 두 분의 불천지위(不遷之位·큰 공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와 종손으로부터 4대를 모시려면 열두 상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제수품은 간단해야 한다.

원래 종가 차례상에는 많은 음식이 올라가지 않았다. 제례문화의 지침서인 ‘주자가례’에 따라 차례상에 술 한잔, 차 한잔, 과일 한 쟁반을 차리고 술도 한 번만 올리며 축문도 읽지 않는다.

하회마을에서는 상마다 떡과 적, 포와 탕, 나박김치와 갖가지 햇과일과 종부가 직접 담근 술 등 모두 7가지를 올린다. 기제사 때 올리는 밥과 국, 나물은 올리지 않는다. 특이한 점은 술안주 적(炙)은 모두 날것으로 올린다는 것이다.

 

간소한 중양절 차례 상차림 모습
간소한 중양절 차례 상차림 모습

사당에서 모시는 다례 순서도 간단하다. 먼저 음식을 차린 뒤 집사가 신주 문을 열고 종손이 분향(焚香) 강신(降神)한 후 제주 이하 참석자가 절한다. 다시 종손이 신주마다 술을 올리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손잡이가 신주로부터 오른편에 가도록 해 시접 위에 가지런히 올린다. 이것을 삽시정저(揷匙正箸)라 한다.

이대 제주 이하 참석자는 ‘조상님 덕분으로 새로운 곡식을 수확하게 됐으니 많이 잡수시라’는 뜻으로 부복해서 아홉 수저 잡수실 동안 기다려야 한다. 이후 집사가 수저를 거두고 제주 이하 참석자들이 두 번 절하는 것으로 조상을 배웅한다. 이러면 중구절 다례가 끝난다. 이렇게 간단한 다례를 두고 무축(無祝·축이 없음) 단작(單爵·술 한 잔)이라 말한다.

 

정성스레 차례음식을 장만하는 모습.
정성스레 차례음식을 장만하는 모습.

이 다례의 특징은 분향 강신 때 쓰는 모사(茅沙) 그릇에 있다. 일반적으로 모사는 모래를 담고 그 위에 띠(茅)를 꽂았으나, 양진당 다례에는 유기 대접에 솔잎을 담아 모사를 상징했다. 또한 술안주인 적(炙)은 모두 날것이다.

류한철 국장은 “이것은 혈식군자(血食君子)라 하는데, 군자는 익히지 않은 음식을 올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날고기를 쓰는 더 구체적인 뜻은 배려와 나눔이다. 참석자들은 집으로 돌아갈 때 생선 한 토막씩 가져가는데 이는 봉송(奉送)이라는 제사 예절의 하나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내륙인 이곳에선 생선을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종가 제사 때 얻어가는 생선으로 탕을 끓여 온 가족이 나눠 먹으면서 오랜만에 생선 맛을 보았고, 조상의 음덕을 기렸다”고 전했다. /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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