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신라의 삼국통일 - 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
⑮ 두 명의 여동생 모두를 김춘추와 결혼시킨 김유신은…

김유신은 권력의 확장과 유지를 위해 여동생 둘 모두를 무열왕과 결혼시키고, 자신의 아들을 처형하라고 왕에게 권하는 냉혹한 면도 가졌던 사람이다. /이용선기자
김유신은 권력의 확장과 유지를 위해 여동생 둘 모두를 무열왕과 결혼시키고, 자신의 아들을 처형하라고 왕에게 권하는 냉혹한 면도 가졌던 사람이다. /이용선기자

무능한 조선의 왕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며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1545~1598).

오늘날로 말하자면 해군 작전사령관격인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활약하며 보여준 이순신의 지략과 기개는 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023년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장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또 한 인물이 있다. 이순신보다 1천 년쯤 앞 시대를 살다간 김유신(595~673)이다. 이 두 ‘장군’은 한국에서라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이름을 알고, 대략의 업적을 이해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시간을 뛰어넘은 ‘빅 스타들’이다.

김유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노력으로 인격과 품성을 만들어간 것인지는 대구한의대 천인석 교수의 논문 ‘김유신의 생애와 사상’의 서두에 잘 설명돼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김유신의 탄생은 가야 왕족 출신 진골 귀족과 신라 왕족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출생설화부터 신이(神異)한 능력을 지닌 그는 어려서부터 지식과 교양을 갖춘 부모로부터 훌륭한 교육 기회가 주어졌고, 성장하면서 문자 교육을 비롯한 경전 교육,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학술과 무예를 배웠다. 15세에 화랑이 되고, 18세에 국선(國仙·화랑들의 우두머리)이 돼 당대 최고의 화랑으로 교육받았다. 그의 가계에서 전수된 충효의 윤리와 합리적 사고, 화랑으로서 ‘세속오계’로 표현되는 신념, 그리고 가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수양과 노력, 왕도정치의 지향이 그의 사상 형성의 기본이 됐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 완수한 위대한 인물
신채호 저서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민족(고구려·백제)을 배반한 인물로 기록

혼인관계도 논란… 두 여동생 무열왕의 아내로·여동생 문명왕후 딸과 결혼도
왕족 김씨는 성골이라 하여 신성시 이 혈통 내 혼인 권장… 정치권력 유지 목적

◆역사의 평가가 엇갈리는 ‘문제적 인물’로서의 김유신

인간의 내부엔 선과 악, 긍정적 면과 부정적 면이 공존한다. 누구라도 그렇다. 이 명제에선 김유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 수많은 고문헌에선 ‘충성스럽고 용맹한 신하이자 빼어난 장수’로 김유신을 표현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도 분명 존재한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근대 한국 역사학계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단재 신채호(1880~1936)는 김유신을 지목해 “민족의 배신자”로 냉혹하게 평가 절하했다.

이와 관련된 논문을 읽어보자. 대구가톨릭대 임선애의 ‘한국문화와 김유신의 재현양상’ 중 일부를 아래 인용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위대한 인물이지만, 역사학자 신채호에 이르면 김유신은 민족(고구려와 백제)을 배반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중략) 역사 기록물에 의하면 김유신은 영웅과 모략가라는 배치되는 단어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 연원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과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신채호의 저서)’의 주장이 대조를 이루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전자의 기록에서 보면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위대한 인물이지만, 후자의 주장에 이르면 김유신은 민족을 배반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김유신에 대한 양극화 현상은 이후 지금까지 한국문화 속에 조명되는 김유신의 재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후략)”

위와 같은 역사학계의 평가만이 아니다. 김유신과 그 가족들의 ‘혼인 관계도’를 그려보면 지금의 상식으론 이해가 불가능한 걸 넘어 외마디 비명이 나올 정도다.

잘 알려져 있듯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는 김춘추(무열왕)와 결혼해 후에 왕비(문명왕후)가 된다. 그런데,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유신의 또 다른 여동생 보희도 무열왕의 아내였다고 한다.

고대 제국의 왕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건 특별히 손가락질 받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같은 친자매를 동시에 데리고 산다는 건 유례가 드문 경우. 이 혼맥 형성의 배후엔 김유신의 권력욕이 있었다는 게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

 

신라의 왕족들은 대부분 근친혼을 했다. 신라시대의 왕과 자손들을 상상해 그렸다. /삽화 이건욱
신라의 왕족들은 대부분 근친혼을 했다. 신라시대의 왕과 자손들을 상상해 그렸다. /삽화 이건욱

◆김유신 장군이 여동생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여기서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김유신은 예순 살이 되던 해 두 번째 아내를 맞는다. 그런데 그 여성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바로 자신의 여동생 문명왕후의 딸이다. 회갑 노인이 어린 조카와 결혼한 것이다.

‘삼국사기’ 등에 지소부인(智炤夫人)이라 기록된 이 여성은 평소 “외숙부”라 불렀던 사람의 아내로 살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기자의 후배 하나는 “사람 족보가 왜 그래요?”라며 정색했다.

이는 1천~2천 년 전 신라였으니 가능한 이야기다. 근친간의 혼인은 그 사례가 김유신 가문만이 아닌 신라 왕족들 사이에서도 흔했다고 한다. 왜였을까?

수원과학대 교양학부 류선무 교수의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위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읽힌다.

“신라는 족내혼(族內婚·같은 씨족, 종족, 계급 안에서 배우자를 찾는 혼인)을 철저히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정치권력과 부귀영화를 자기 성씨(姓氏)로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의 결과였다. 한 번 왕이 되면 가능한 한 자기 집안 사람과 결혼하게 했다. 신라 초기에 박씨가 지배하는 동안 여덟 왕이 왕위에 올랐는데,그 중 여섯 왕이 박씨 왕비를 맞이했으며,왕권이 석씨(昔氏)에게 돌아가자 석씨 또한 자기 씨족만을 왕비로 맞이했다. 4세기에 김씨가 왕위에 오른 후 초기에는 과거의 왕족이었던 박 씨나 석씨를 왕비로 맞기도 했으나 왕권이 강화될수록 김씨만을 왕비로 맞이했다. 왕족 김씨는 상류사회 계층을 형성해 김씨 사이에서 출생한 자손을 성골(聖骨·골품제도의 최상위 계급)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이 혈통 내에서 혼인을 하도록 권장했다. 신라의 혼인은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계외 모계,적서(嫡庶·적자와 서자)의 구별은 분명했지만, 여성의 지위나 인권은 남자와 거의 대등하지 않았다 한다.”

◆자신의 아들을 처형하라고 문무왕에게 요구한 냉혹한 측면도

2023년 현대인의 상식으론 이해가 어려운 혼인을 진행시키고, 스스로도 행한 김유신에게선 덕장(德將)이나 지혜로운 관료의 모습이 아닌 차갑고 냉정한 모습도 확인된다.

원술(元述)은 김유신의 아들이다. 20세기 한국의 일부 권력자들은 전쟁이 없는 시대임에도 자신의 돈과 힘으로 아들을 병역의무로부터 해방시켜주곤 했다.

신라의 국무총리이자 국방장관이자 합동참모의장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했던 김유신은 이들과는 달랐다. 자식인 원술을 가장 위험한 전쟁터에서 싸우게 했다.

거기까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성)라고 볼 수 있다. 비판받을 일이 전혀 아니다. 근현대 영국의 왕자들과 귀족청년들 또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투에 앞장서기도 했으니까.

헌데, 문제는 원술이 당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서 돌아왔을 때 발생한다.

김유신은 아들 원술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화랑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臨戰無退)’를 저버린 것이라 판단해서였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김유신은 자신의 조카이자 당시 신라의 통치자였던 문무왕에게 “못난 아들 원술이 왕과 우리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목을 베어 죽임이 마땅하다”고 권유한다.

대의명분(大義名分) 앞에서는 혈족과의 인연도 주저 없이 단숨에 끊어버리는 냉혈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문무왕은 그럴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김유신은 문무왕의 외숙부. 그러니, 원술은 문무왕의 사촌인 것이다. 일부러 패한 것도 아니고, 죽을힘을 다해 싸우다가 안타깝게 진 장수를, 그것도 친척을 죽이는 건 왕으로서도 못할 짓이었기에.

이 이야기는 서울예술대학 설립자 유치진(1905~1974)의 희곡 ‘원술랑’에 구체적으로 담겼다. ‘나무위키’는 관련 내용을 아래와 같이 부연하고 있다.

“‘원술랑’ 2막의 내용은 신라군이 당나라군의 계책에 속아 궤멸 수준으로 참패한 뒤 원술이 아버지 김유신 앞에 나타났고, 김유신은 ‘전우들이 죽어가는데 어찌 비겁하게 혼자 살아 돌아왔느냐’며 꾸짖자 원술은 부끄러운 마음에 자결하려 하다가 사신이 ‘계급을 강등시켜 나라 밖으로 내쫓으라’는 왕의 명령서를 들고 오자 물러가는 것으로 끝난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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