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신라의 삼국통일 - 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
⑭ 통일된 신라, 매력적 건축물로 국력을 과시하다

통일신라 초기인 문무왕 시절 만들어진 동궁과 월지를 하늘에서 내려다보았다.

전쟁은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부정할 수 없는 비극이다. 그건 옛날과 지금이 다를 바 없다.

신라는 백제와의 격전, 고구려와의 전투, 당나라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싸움을 오랜 시간 벌였다. 쉽게 이야기하면 7세기 중반과 후반 모두가 ‘전쟁의 시기’였다. 나라가 불길에 휩싸이는 경우가 흔했고, 많은 신라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긴 시간의 전쟁이 야기한 처참한 상황이 끝나고,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룬 신라가 안정화의 길을 걷게 된 건 문무왕(김법민) 때에 와서다.

아버지 무열왕(김춘추)과 외숙부인 태대각간 김유신의 조력을 등에 업은 김법민은 ‘삼국통일을 완성한 스타 주군(主君)’이 돼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7세기 후반 일이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절이 도래한 신라가 문무왕의 주도 아래 계획한 차기 프로젝트는 뭐였을까? 즉답하자면 ‘문화와 예술의 부흥’이었다.

 

신라 왕실의 힘을 보여준 문무왕의 ‘문화예술 프로젝트 제1호’ 동궁과 월지

인공 호수에 동궁·임해전 등 미려한 건물을 짓고 희귀한 꽃과 짐승도 길러

감은사는 신문왕이 긴 시간 노력 끝에 만들어낸 통일신라 불교예술의 절정

◆건축물을 통해 왕실의 권위와 번성한 국가의 힘을 보여주다

비단 신라만이 아니다. 전 세계 여러 고대·중세 왕조는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고, 강성한 국력을 내외에 보여주기 위해 거대한 건축물을 경쟁적으로 만들었다.

2023년 현재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여행지 중 하나인 베트남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베트남의 마지막 군주 국가 ‘응우옌(Nguyen)’은 중국의 자금성(紫禁城)을 모방한 화려한 궁전을 축조한다. 이른바 후에 왕궁(Hue Imperial Citadel)이다.

베트남 중남부의 매력적인 여행지에 자리한 이 궁전은 응우옌 왕조가 빛났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아래는 후에 왕궁에 관한 ‘베트남 셀프 트래블’의 부연.

“후에를 수도로 한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응우옌의 궁터로, 해자와 10km에 달하는 성곽으로 둘러싸여 시타델(Citadel·성채)이라고도 부른다. 프랑스와 미국 등 세계열강과의 전쟁을 거치며 많은 문화유산들이 소실됐으나, 종전 후 베트남 정부와 유네스코의 관심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돼 건물들이 복원되고 체계적인 관리를 받고 있다.”

베트남과 이웃한 캄보디아에도 과거 번성했던 크메르 왕조의 흔적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건축물이 존재한다. 앙코르 와트(Angkor Wat)다.

한 해 수십 만 명의 한국인이 찾는 핵심 관광지이며, 프랑스와 독일, 영국과 스웨덴에서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온 유럽인들의 입을 벌어지게 만드는 완벽한 조형미의 사원.

기자 역시 이곳을 4번 찾았고, 갈 때마다 이름난 이탈리아 로마의 어떤 성당보다 빼어난 미적 완성도에 감탄하곤 했다. ‘위키백과’는 앙코르 와트를 이렇게 설명한다.

“캄보디아 시엠레아프 주의 앙코르에 위치한 사원으로, 12세기 초에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크메르 제국의 사원으로서 창건됐다. 앙코르 유적 중 가장 잘 보존돼 있으며, 축조된 이래 크메르 제국 모든 종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맡은 사원이다. 처음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힌두교의 3대 신(神) 중 하나인 비슈누 신에게 봉헌되었고, 나중에는 불교 사원으로도 쓰였다. 옛 크메르 제국의 수준 높은 건축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동궁과 월지, 통일 완성한 신라의 화려한 문화예술 부흥

신라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와 캄보디아 크메르 왕조에 한참 앞서 신성함이 담긴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냄으로써 통일을 이룬 나라의 무너질 수 없는 권위와 뻗어나가던 국가의 힘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안압지(雁鴨池)로 불렸던 월지(月池) 일대에 신라의 탁월한 건축기술과 예술적 세련미가 담긴 다수의 건물들을 쌓아올리기 시작한 것. 그렇다. 바로 ‘동궁과 월지’다.

동궁과 월지의 건설은 삼한일통을 이룬 문무왕의 ‘문화예술 프로젝트 제1호’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1978년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은 나라의 자랑 중 하나인 동궁과 월지를 지목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동궁과 월지는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해 있는 통일신라시대 궁원지로,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宮內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奇獸) 또한, 문무왕 19년에는 궁궐을 화려하게 중수하고 동궁을 지었다’(重修宮闕 頗極壯麗… 創造東宮)고 쓰여 있다. 그리고,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월지 인근의 ‘임해전에서 연회를 개최하였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와 같은 문헌 기록들은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연못과 건물지군, 그리고 ‘의봉4년(儀鳳四年)’ ‘조로2년(調露二年)’이라 새겨진 와전(기와와 벽돌)과 다수의 목간(木簡) 등으로 그 신빙성이 입증된 바 있다.”

인공 호수를 파고, 왕자를 교육시킬 동궁을 짓고, 임해전 등의 미려한 건물을 만든 문무왕은 거기에 희귀한 꽃을 심고, 보기 드문 짐승들까지 풀어 신라 왕실의 힘을 보여줌과 동시에 어렵게 이룬 삼국통일이란 크나큰 성취를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살아가는 내내 아버지 무열왕과 외숙부 김유신을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을 것이 분명한 문무왕 김법민은 내심 “선친과 외삼촌은 전쟁에서의 용맹만을 보여줬지만, 나는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감각도 더불어 갖춘 성군(聖君)”이란 걸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물론, 이는 기자의 추측일 뿐이지만.

어쨌건 현대에 들어와 동궁과 월지에선 발굴과 복원이 지속됐고, 그건 21세기인 지금도 진행형이다.

복원된 1천400여 년 전 신라의 문화 유적이 2023년 오늘 경주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와 함께 문화적 자긍심까지 선물하고 있으니, 문무왕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慧眼)을 가진 통치자였던 듯하다.

 

신문왕이 아버지인 문무왕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 완성시킨 경주 감은사의 터.
신문왕이 아버지인 문무왕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 완성시킨 경주 감은사의 터.

◆신문왕, 대를 이어 문화예술 ‘주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동궁과 월지는 경주 시내 한복판에 자리했다. 그러니, 경주를 찾는 남녀노소 거의 모두가 어렵지 않게 둘러볼 수 있다.

첨성대와 대릉원(大陵苑), 거기에 최근에 ‘경주의 핫 스폿’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황리단길이 모두 동궁과 월지 지척에 자리했다. 말 그대로 신라 천년의 역사와 청춘들의 즐거움이 어우러지는 공간인 셈.

그 정도의 감각적 만족으로는 무언가가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가용이나 택시, 혹은 버스를 타고 30분쯤을 달려 감은사(感恩寺)가 자리했던 터를 찾는다.

동궁과 월지가 문무왕 김법민이 완성시킨 통일신라의 ‘랜드마크(Landmark)’라면 감은사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김정명)이 긴 시간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통일신라 불교예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사찰의 이름인 ‘감은(感恩)’은 말 그대로 ‘은혜를 고맙게 여기다’라는 뜻. 누가 누구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것일까? 일연의 ‘삼국유사’에 이에 대한 해답이 담겼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신라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신라 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년)에 완공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巖)에 안장했으며, 신문왕이 선왕(先王)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그 이름을 감은사라 했다.”

문무왕에게는 콤플렉스와 함께 큰 유산(遺産)을 물려준 두 사람이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열왕과 김유신이 바로 그들.

신문왕 역시 누구도 쉽게 물려줄 수 없는 커다란 물질적·정신적 자산을 선사한 사람이 분명 있을 터. 그는 다름 아닌 아버지 김법민, 즉 문무왕이었다.

통일된 국가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고 떠난 아버지 문무왕은 신문왕에게 ‘마음 속 스타’였을 터.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이라는 비극 위에서 만들어진 통일신라. 그 시작점인 7세기 후반. 세계 어느 나라도 흉내 내기 힘든 ‘문화예술의 집적체(集積體)’ 감은사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계속)

/사진 이용선기자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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