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 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
⑬ ‘삼한일통’ 이룬 문무왕의 부친과 아들을 떠올리다

문무왕을 그리워하며 아들 신문왕이 완성했다는 감은사의 터. 쌍둥이 석탑 중 1기는 현재 보수 중이다. /이용선기자

현대와 고대가 크게 다를 바 없다. ‘외교’는 국가 발전을 추동한다.

이웃한 나라들과의 교류를 통해 얻어낼 건 얻어내고, 양보할 것은 양보함으로써 전쟁의 위험성을 줄이고, 경제 발전의 포인트를 찾아내는 건 7세기에도 중요한 일이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그래서다. 통치자에겐 ‘탁월한 외교 전략가’ 하나를 가지는 게 용맹한 장수 열을 가지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청년 시절의 김춘추(무열왕·603~661)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았다.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듬직한 신하였던 것.

문무왕 김법민의 아버지 김춘추가 왕이 되기 전 어떤 외교적 성과를 보였고, 당시 초강대국 당나라에서 어떤 활약을 했으며, 그를 응접한 당나라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는 ‘삼국사기’에 잘 기록돼 있다. 아래 인용한다.

“648년 12월 김춘추는 아들과 함께 당(唐)에 입조하였고,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이곳에서 국학(國學)을 방문해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하였으며, 신라의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했다. 당 태종으로부터 특진(特進)의 벼슬을 받고, 당에 체류하던 중 태종의 호출로 불려가 만나게 된 자리에서 백제 침공을 위한 지원군을 요청해 허락받았다…(중략) 김춘추가 신라로 돌아갈 때 당 태종은 3품 이상의 관인들을 불러 송별연을 열었고, 귀한 책과 글씨를 선물했으며, 장안성(長安城)의 동문(東門) 밖까지 나가 직접 전송했다.”

 

김유신과 함께삼국 통일의 주역 김춘추

정치적·외교적 실리를 잘 구사한 군주

선풍도골의 외모까지 안팎이 매력적

삼한일통의 그림 완성시킨 업적에도

일생 부친과 비교되며 살았을 문무왕

그의 유언 “죽어서도 백성을 지키는 용이 될 것이니, 나를 산에 묻지 말고 일본 해적이 출몰하는 바다에 장사 지내라”

부친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노력 했던 마지막 ‘콤플렉스 극복 시도’ 였을 수도

◆당나라 왕과 관료들 매료시킨 김춘추의 외교 전략

위의 문장을 지금의 형식으로 풀어 쓰면 ‘마흔다섯 살 신라인 김춘추는 중국 당나라를 방문해 국립대학에서 하늘에 올리는 제사와 학자들의 강의를 참관해 주목받았고, 높은 벼슬까지 얻었다. 이와 더불어 백제를 공격할 병사들을 지원하겠다는 당나라 왕의 약속을 받아낸 후 성대한 환송연 끝에 귀한 선물을 잔뜩 가지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왔다’ 정도가 될 터.

2023년 오늘날 이 정도의 외교 성과라면 차관은 장관으로, 장관은 총리로 승진했을 게 분명하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무신(武臣)으로서 최고 능력을 발휘한 건 단연 김유신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빼어난 신라의 7세기 문신(文臣)은 누굴까? 답은 이미 나왔다. 김춘추다.

김춘추는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도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외모에 반한 당나라 귀족부인들이 추파를 던졌다는 야담(野談)까지 전한다. 그는 안팎이 모두 매력적인 사내였던 것이다.

역사학자 박현숙 교수의 논문 ‘삼국유사 기이편 태종 춘추공조의 내용 구성과 의미’에서도 김춘추라는 이름은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박 교수는 그에 관한 학계의 엇갈리는 평가까지 서술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

“천년의 신라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을 들라고 한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일 것이다. 그리고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조명을 받아왔다…(중략) 김춘추에 대한 평가는 ‘외교를 잘 구사해서 실리를 도모한 군주’라는 평가와 ‘외세 의존적이고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음모가’라는 평가가 상존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보다는 삼국통일에 있어서 김춘추의 정치·외교적 역량을 파악하고, 그를 매개로 당시의 대내외적인 상황을 복원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아버지를 넘어서야 한다’는 김법민의 강박 관념

돌올하고도 빼어났다. 김춘추는 그런 인물이다. 지나치게 잘난 부친을 둔 아들은 ‘어떻게든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기 십상이다. 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콤플렉스가 되기도 하다.

문무왕 김법민은 김춘추의 아들. 아버지가 잘 닦아놓은 고속도로 위를 달려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를 몰아냄으로써 삼한일통(삼국통일)의 구체적 그림을 완성시킨 사람이 바로 문무왕이다.

하지만, 나무가 크면 그늘도 짙은 법. 문무왕은 평생 거대한 고목(古木)처럼 자신 앞에 버티고 선 아버지의 그림자를 넘어서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 속에서 살았을 듯하다.

캐나다 총리인 쥐스탱 트뤼도(Justin Trudeau·52)는 잘생긴 외모로 유명한 정치인이다.

세계 각국의 대통령과 총리가 모이는 G8 또는, G20 정상회담에서 그는 여타의 지도자들을 압도한다. 190cm에 육박하는 큰 키에 영화배우 같은 얼굴. 거기에 더해 탁월한 친화력과 외교적 수완까지. 그런 트뤼도 총리 역시 ‘아버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현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의 아버지는 피에르 트뤼도(1919~2000) 전 총리. 나무위키는 피에르 트뤼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캐나다 자유주의 진영의 신화와 같은 존재. 근현대 캐나다가 배출한 몇 안 되는 세계사적 비중을 지닌 정치인이다. 오늘날 캐나다 국민들이 자부심으로 삼는 무상의료와 자유주의의 토대를 세웠다. 아들과 달리 보수진영에서도 호평 받는다. 현대 캐나다의 기조를 만든 위대한 정치인 중 한 명이다.”

이쯤 되면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트뤼도 총리가 가졌을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미루어 짐작된다. 잘해봐야 “아버지를 닮았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아버지는 훌륭한데 아들은 왜 저따위야”라는 비난을 받을 게 뻔하니까.

아마 1천400년 전 문무왕 김법민의 심정도 그러했을 것 같다. 일생 부친 무열왕 김춘추와 비교되면서 살았을 터이니.

 

신라는 물론 당나라에서까지 빼어난 학문과 매력적 외모를 인정받았다는 무열왕 김춘추를 상상해 그렸다. /삽화 이건욱
신라는 물론 당나라에서까지 빼어난 학문과 매력적 외모를 인정받았다는 무열왕 김춘추를 상상해 그렸다. /삽화 이건욱

◆문무왕릉과 감은사를 돌아보고 쓴 졸시 한 편

‘온전한 삼국통일을 이룬 영웅’이 아닌, 사는 내내 아버지와 외숙부 김유신을 뛰어넘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던 김법민의 감춰진 또 다른 모습이 분명 있을 것 같다.

문무왕의 바다 위 유택(幽宅)과 용이 된 문무왕이 밤이면 찾아가 잠을 청했다는 감은사 터를 여러 차례 돌아봤다. 졸시 ‘문무왕의 잠’은 그때 기자의 머릿속을 떠돌던 복잡한 감정이 만들어준 것이다.

신문왕이 울었다

감은사 금당 아래를 들여다보며

며칠째 아버지가 처소에 들지 않는다

참꽃 매화 만개하고

죽순도 무릎 높이로 자랐건만

무엇이 하늘에 가닿지 못했나

할아비 유택을 찾아 울어나 볼까

아비는 문희 할미의 오줌에서 왔으니

멀리 재 너머 바다는 푸르고

쌍둥이 석탑 뒤로 해 떨어지는데

잠을 잃은 용이 된 문무왕

아들이 마련한 잠자리는 삼도천보다 멀고

천자의 수중릉 희롱하는 흰 파도

우울한 햇살 아래 일찍 온 제비 두 마리

찬바람은 아직 그칠 기미가 없다.

잘 알려져 있듯 문무왕의 유언은 “죽어서도 백성을 지키는 용이 될 것이니, 나를 산에 묻지 말고 일본 해적이 출몰하는 바다에 장사 지내라”는 것이었다.

이는 끝끝내 아버지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아등바등 했던 문무왕 김법민의 마지막 ‘콤플렉스 극복 시도’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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