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무심하고 냉정하고 징그러운 당신.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언제나 뜨거운 사랑의 갈망을 채워주지는 못하기에. 반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부드럽고 그윽하고 기쁨을 샘솟게 하기 때문이다. 야누스 같은 당신. 결국 ‘사랑한다’는 단어만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당신에 대해 어떻게 쓰든, 당신의 얼굴을 지울 수 없다는 진실에 도달하면서.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