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단.

단종과 관련 영주시(순흥)는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단종복위를 이끌던 금성대군의 죽음, 순흥도호부의 폐부와 함께 역적의 고장이라는 오명, 백성들의 죽음으로 이어진 피끝마을, 올곧은 충성심으로 백성들로부터 신격화 된 금성대군의 제를 지내는 두레골 성황당이 아직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단종애사에는 비구니가 된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와 남편 정종, 사약을 받은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과 안평대군의 가슴 시린 사연을 담고 있다.

단종과 관련한 슬픈 가족사와 단종으로부터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은 권력의 화신인가, 왕권 강화를 위한 결단이었나, 순흥은 역모의 땅인가, 충절의 고장인가를 두고 현재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이어지고 있다.

 

단종 복위 실패에 금성대군 사약 받고 300여 백성도 무참히 희생
순흥부 주민, 금성대군 충절 받들고 신격화… 매년 성황제 이어와

□ 금성대군과 두레골 성황제

금성대군은 세종과 소현왕후 사이에서 6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유(瑜), 단종의 숙부이자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의 친동생이다.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권탈취의 야심을 갖자, 이에 반대하다 1455년 단종 3년 모반혐의로 삭녕에 유배되고 다시 광주로 옮겨졌다.

1456년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돼 경상도 순흥(영주)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켜 단종복위를 계획했으나 거사 전에 발가되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순흥부의 주민들은 사약을 받고 사사된 금성대군의 충절을 받들어 신격화하고 사사된 곳에서 그의 혈흔이 묻은 돌을 발견하고 주변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금성단이라 하며 현재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금성대군의 혈석은 소백산 국망봉 밑 두레골에 옮겨 모셔졌고 이 일을 주관한 사람들은 상민(常民) 자치기군인 순흥초군청이었다.

순흥 사람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날 정성을 모으고 소를 잡아 금성대군 제사를 지내는 두레골 성황제를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금성단 근처에는 정축지변 당시 스스로 말라죽은 후 200년 뒤 되살아나 충신수라 불리는 압각수가 있다.

압각수가 살아난 1년 후쯤 순흥도호부가 재설치 돼 압각수는 현재까지 영물로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충신수라 이름 붙여진 압각수.
충신수라 이름 붙여진 압각수.

□ 피끝마을

마을 이름은 ‘피’가 냇물을 따라 흐르다 멈춰 ‘끝’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1457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복위 거사가 실패하자 세조의 측근인 한명회와 6촌간인 안동부사 한명진이 군사를 이끌고와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인근 백성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그리고 다시 한양에서 철기병이 출동해 2차 학살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당시 도호부였던 순흥은 황폐화되고 근방 30리 안에 산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정축지변이라 한다.

당시 순흥과 주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284호에 1천679명이었지만 단종복위 사건으로 당시 약 300여명의 백성들이 희생 됐을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론하고 있다.

단종애사의 묘사에 따르면 이때 순흥 청다리 아래 목이 잘려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10리를 흘러 멈춘 곳이 지금의 동촌1리이다. 이런 연유로 이곳은 ‘피끝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당시 순흥에 본적을 두고 있던 순흥 안씨 문중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전해진다.

□ 순흥면의 수난

순흥은 역모의 땅이라 해 온갖 차별을 받게 된다.

당시 도호부였을 만큼 컸던 순흥은 단종복위 사건을 계기로 폐부가 되고 행정 구역은 각각 영천(榮川), 풍기, 봉화로 나뉘어져 통합 된다.

순흥에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정축지변 당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밤마다 울어대자 이들을 달래고자 바위에 붉은 글씨로 경(敬)이라 새겼다는 경자바위의 유래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이야순의 글을 통해 전해지며 경자 바위는 소수서원내 죽계천변에 현존하고 있다.

현재도 지역 주민들은 어린아이들을 놀릴 때 ‘순흥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는데 이는 정축지변 당시 고아가 된 어린 아이들이 이곳에 버려졌다가 키워진데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종 복위운동 실패와 관련, 순흥 청다리 아래 목이 잘려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10리를 흘러 멈춘 곳이 지금의 동촌1리이다. 이런 연유로 이곳은 ‘피끝마을’로 불리고 있다.  /영주시 제공
단종 복위운동 실패와 관련, 순흥 청다리 아래 목이 잘려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10리를 흘러 멈춘 곳이 지금의 동촌1리이다. 이런 연유로 이곳은 ‘피끝마을’로 불리고 있다. /영주시 제공

□ 단종

단종은 1441년(세종 23)에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弘暐)다.

비는 여산부원군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 송씨다.

단종과 정순왕후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1448년(세종 30)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의 즉위와 함께 왕세자가 됐다.

1452년5월, 문종이 죽으면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단종의 나이 12세였다.

단종은 즉위 1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란(靖亂)으로 유명무실한 왕이 됐다.

1455년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1457년(세조 3) 6월에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친 것을 기화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됐다.

노산군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영월로 유배된 단종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된 사건을 계기로 사약을 받았다.

□ 단종 가족사

문종의 아내 세자빈 권씨는 단종을 낳은 다음날 산후병으로 사망한다.

문종은 재혼하지 않고 6살이 된 경혜공주와 단종 남매를 키웠으나 재위 2년만에 사망하면서 어린 남매만이 남게 됐다.

경혜공주의 남편 영양위 정종은 금성대군과 친했다는 이유로 강원도 영월, 경기도 양평, 수원, 김포 통진으로 유배지를 옮겨 다녔다.

이때부터 경혜공주는 정종과 함께 유배지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1456년 사육신 사건이 터지며 정종과 공주는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고 이곳에서 혼인한 9년만에 아들 정미수가 태어난다.

정종은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1461년 한양으로 불러올려 심문을 하고 거혈형에 처해진다.

경혜공주는 동생 단종과 남편 종종, 삼촌들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한 많은 삶을 살다가 비구니가 된다.

1474년 38세 일기로 생을 마친다.

단종의 삼촌인 안평대군은 계유정난에서 이복동생 계양군 이증의 무고로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 반대세력을 죽일 때 강화도로 귀향 보내지고 이후 교동도로 이배 되며 36세에 사사 당한다.

안평대군은 김종서가 수양대군을 견제하고자 끌어들이면서 다수파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됐다.

세조(수양대군)의 삼촌이자 단종의 큰 할아버지격인 양녕대군은 세조를 지원하며 단종, 금성대군, 안평대군, 정종의 죽음에 깊이 관여했다는 내용이 세조실록 9권에 남아 있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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