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명저 읽기와 토론’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의 몸과 마음은 그대들의 것인가?!” 학생들 얼굴이 뜨악하다.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몸과 마음은 모두 나의 것이란 자명한 사실을 왜 물어보느냐, 그런 눈짓이다. 문제는 이것이 간단치 않다는 데 있다. 과연 우리 몸과 마음이 우리 것인지, 하는 문제가 단순명쾌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인지 자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몸이 내 소유라면 몸은 언제나 나의 희망과 요구에 따라야 한다. ‘멘사 클럽’에 들어갈 만큼 머리는 명민해야 하고, 걸출한 운동선수의 체격과 체력이 있어야 한다. 코로나19로 3년 넘게 고생한 우리로서는 예방주사를 맞지 않아도 전염병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 실상은 어떤가?! 툭하면 여기저기 문제를 일으키는 육신이 일반적인 현상인 걸 보면 내 몸은 내 바람과 무관한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변덕스럽지 않고 관대하면서 언제나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가?! 나는 초조하고 불안하며 마음에 차지 않고, 툭하면 짜증을 내고, 토라지는 일이 다반사에 옹졸하고 쩨쩨하며 이기적이다. 주변 사람들과 원만하게 아우러져 살아가는 일도 종종 있지만, 속으로는 앵돌아져 있으니 불편하기가 유만부동(類萬不同)이다.

무언가의 주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조건은 항상성(恒常性)과 주재성(主宰性)이다. 언제나 그러하다는 것이 항상성이다. 들쭉날쭉 넘나듦이 없이 똑 고르게 그 본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내가 원하는 시공간과 상황에서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주재성’이다. 아무리 곤고(困苦)하고 난처한 상황이라도 내가 바라는 수준을 지켜내고 오히려 전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녕 그러한가?!

이런 설명을 듣고 난 학생들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도, 고민해본 적도 없는 자명한 명제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나이 먹은 세대의 사유와 인식은 변화하기 어렵다. 근본적인 성찰과 회개(悔改)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인식의 성립과 성장은 쉽지 않다. 반면에 20대 청춘의 영혼은 상대적으로 유연하다. 이런 까닭에 그들이 더 나이 먹기 전에 최소한의 지적·정신적인 문제 제기가 절실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지식의 전파는 여전히 주입식 교육과 집중적인 암기에 편중되어 있다. 학문과 종교의 차이는 ‘도그마’의 유무에 있다. 언제든 더 올바르고 새로운 진리를 향해 열려 있는 분야가 학문 혹은 과학이다. 반면에 특정한 방향으로 완전하게 닫힌 세계로 돌진하는 것이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같은 유일신에 기초한 종교다. 오늘날 한국 대학에서 지식과 정보의 전파과정은 나날이 선교와 비슷해져 간다는 혐의가 짙다.

유연한 자세로 학문에 임하려면 결론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명제와 지식과 정보에 물음표를 부여해야 한다. 미래로 열려진 지성의 시대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