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오래전 일이다. 서관에서 강당을 거쳐 정문으로 내려가는 길에 정한숙 선생이 서 있었다. 그런데 선생의 자세가 이상했다. 오른손을 눈썹 위에 갖다 붙이고 경영대 방향 동쪽 하늘을 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궁금증이 많은 나는 선생께 여쭈었다. “뭘 보십니까?!” “안 보이나?” “글쎄요?” 나도 선생을 따라 같은 자세를 취했으나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 특별한 건 안 보입니다.” “저기 멀리서 봄이 오고 있어.”

‘뭐지?’ 하고 나는 혼잣말했다. 노교수의 눈에는 봄이 오는 것이 보였으나, 젊은 육신의 내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노소(老少)의 문제가 아니었다. 봄을 간절히 그리는 초로의 교수와 봄이 아쉽지 않은 청춘의 차이가 불러온 결과가 아니었나 한다. 정한숙 선생이 지금도 떠오는 것은 “시는 무조건 암송해야 한다”는 소중한 말씀 때문이다. 선생의 ‘소설 기술론’ 강의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말씀이 그것이다.

신입생 시절에 나는 두 가지 일만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하나는 손에 닿는 대로 시인들의 시집을 찾아 읽고 마음에 드는 작품은 외우는 것이었다. 윤동주, 이육사, 서정주, 한용운 시인의 작품이 주요 대상이었다. 여기 덧붙여 시인들의 평전을 읽는 것이었다. 그 둘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영어판을 아껴서 읽는 일이었다. 읽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어린 왕자’를 선물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적잖은 시를 기억한다. 시조와 한시, 일본의 하이쿠 몇 편도 번역으로 기억하며, 러시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시도 암송한다. 정한숙 선생의 말씀은 진리였다. 암송하지 못하고 군데군데 이가 떨어져 나간 시편(詩篇)은 아쉽기 그지없다. 요즘도 불가(佛家)의 서책이나 유가(儒家)나 도가(道家)의 경전 가운데 마음을 흔드는 구절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기억하려는 자세는 그때 생겨난 것이다.

지난 2월 16일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가 세상을 버린 날이다. 1917년 12월 30일 태어나 해방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세상과 작별한 동주. 그와 연희전문에서 수학했던 후배 정병욱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동주에 관한 안목을 넓혔던 기억도 어제처럼 선연하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을 모두 헤일 듯합니다.”로 시작하는 ‘별 헤는 밤’과 연관된 정병욱 선생의 글은 잊히지 않는다. 본디 ‘별 헤는 밤’의 마지막 연은 “따는 밤을 세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였다고 한다. 병욱은 마지막 연이 너무 허전하다는 말을 동주에게 전했고, 두어 달 뒤에 동주가 마지막 연에 새로운 부분을 덧붙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부끄러운 자신을 부정하는 청년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시인의 면모를 아름답게 그려낸 동주. 창밖 촉촉한 빗소리가 봄을 부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