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지난 2월 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역사적인 판결이 나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첫 번째 판결이 나온 것이다. 재판부는 베트남인 응우옌 티탄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피고 대한민국의 명백한 불법행위가 인정된다면서 원고에게 3천만 원과 관련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한국군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소속 군인들이 1968년 6월 12일 작전 중에 원고 가족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원고의 이모와 남동생, 언니가 현장에서 사망하고, 원고와 오빠가 중상을 입은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소멸시효가 완료됐다는 한국 정부의 주장 역시 원고가 처한 심각한 장애 사유로 발생한 늦은 권리행사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판결에 한국인들의 증언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한다. 베트남전에 파병된 해병대 소속 증인들이 한국군이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한국 정부는 1965년 10월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 파병을 기점으로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4만8천여 명을 베트남에 보냈다. 그 결과 5만여 명의 베트남인을 죽이고, 한국군 5천여 명의 사망자와 1만여 명의 부상자, 2만여 명의 고엽제 환자가 생겼고, 총 1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언젠가 베트남을 방문한 적이 있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시작해 다낭에 이르는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방문 목적은 베트남의 전쟁역사박물관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주요 도시에는 예외 없이 전쟁역사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에서 방송으로 안내하는 베트남 전쟁 전개 과정이 처음에는 영어로 바로 다음에 한국어로 진행된다는 사실이 특이하게 다가왔다.

파리를 관통하는 센강의 유람선에서 흘러나오는 언어는 프랑스어, 영어, 도이치어 순서였다. 그래서인지 베트남 전쟁역사박물관을 찾은 푸른 눈의 여행객들은 실망을 감추지 않고 한국어 방송 도중에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건 자부심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미안함이었다. 남의 나라 내전에 미국의 용병으로 참전하여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학살한 대가로 10억 달러 벌어서 조국 근대화의 소중한 종잣돈으로 썼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 국가들이 보이는 공통의 행태가 있다. 그것은 고대에는 자국(自國)의 위용은 과시하고, 현대에는 피해자로 자신을 둔갑시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일본이 대표적인 본보기다. 다윗과 솔로몬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되, 디아스포라와 유대인 학살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이스라엘. 임나일본부설과 찬연한 만세일손의 국가로 자부하다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만 누누이 강조하는 일본. 그런 대열에 우리도 합류하기 일쑤였다.

이번에 나온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배상 판결은 역사적이다. 가해자로서 대한민국의 책임을 물음으로써 가증스러운 일제와 그 후예들에게 우리의 역사 인식과 책임감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베트남에서 한 짓은 눈 감고 왜 우리에게 사죄를 요구하느냐’ 하는 일본인들의 역겨운 시선을 일거에 날려버린 판결이기 때문이다. 재판부에 고마운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