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영국 방송협회(BBC)’ 동경 특파원 루퍼트 윙필드-헤이즈 기자가 일본 생활 10년을 돌아보며 쓴 기사가 흥미롭다. 이 기사의 일본어 번역을 읽은 일본인이 100만을 넘고, 공감을 표시한 사람도 1만5천명이 넘었다 한다. 루퍼트 기자가 들여다본 일본과 일본인의 명암에 관한 내용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1980년대 일본인은 미국인보다 잘 살았지만, 지금은 영국인보다 넉넉하지 못하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 세계 3위 경제 대국이고, 기대수명도 가장 길며, 범죄도 적고 정치적인 갈등 역시 거의 없는 나라다. 그런 일본이 장기 침체의 늪에 빠진 이유로 루퍼트는 비효율적인 관료주의와 교체되지 않는 지배층,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배척과 순혈주의를 들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 40년 만에 작은 섬나라에서 세계 유수의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이런 배경에는 일본의 관료집단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창설한 독일 제도를 도입·강화하여 일본 국립(제국)대학 졸업생들을 기반으로 고시를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관료제를 실행했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에 상륙한 맥아더는 제국주의에 물든 일본을 변화시키려 애썼으나 관료제만은 바꾸지 못했다. 고시를 통해 관료를 뽑아온 일본에 제국대학 출신을 제외하고는 쓸 만한 인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제국대학은 동경대학, 경도대학, 오사카대학, 북해도 대학 등이 있다. 지금도 건재한 이들의 영향력으로 일본은 관료공화국이라 불린다.

루퍼트는 지배 세력이 변하지 않는 것도 일본의 활력을 저해하는 요인이라 지적했다. 예컨대 아베 신조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전범으로 체포됐으나 교수형을 면하고 나중에 총리가 된다. 그가 창당에 참여한 자민당은 지금도 일본을 지배한다. 루퍼트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과 2차대전 후에도 살아남은 일본 남성 지배층은 민족주의와 ‘특별한 일본’이란 확신으로 무장하여 일본이 침략자가 아니라 희생자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잃어버린 30년’ 동안 일본인들의 삶이 피폐해졌는데도 자민당이 계속 집권하는 것은 콘크리트 지지층인 ‘지방 거주’ 노년층의 영향이 크다고 루퍼트는 말한다. 노년층에 권력이 있고, 저출산으로 젊은이들의 수가 적기 때문에 일본의 정치·사회적인 변화가 어렵다는 얘기다. 일본 사회의 빈약한 시민사회단체도 여기에 한몫한다. 일본인들에 내재한 외국인 혐오와 배타적인 태도 역시 일본의 아킬레스건이라고 루퍼트는 강조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어떤가? 일본의 근대를 모방 답습한 한국 역시 관료공화국이다. 대통령과 국회의 지배집단은 5년이나 10년 단위로 권력을 교체하지만, 관료집단은 그야말로 철밥통에 ‘복지부동’이다.

서울 강남을 필두로 한 ‘신지배층’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으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방의 노년층 역시 강고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의 귀감이 아니라, 타산지석임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가 일본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는 유용한 방책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