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

오랜 세월

편리와 속도와 효율에 길들여진 자들이

실속 없는 배낭을 메고 어디로 은신할 수 있을까

누림의 좋은 시절은 다 지나고

오직 견뎌야만 하는

이 시간의 폐허로부터 구해줄 동아줄을

어느 하늘이 내려줄 것인가

더러 조마조마해지는 맘 달래라고 보낸

생존배낭,

그 속에 친절하게 넣어둔 초콜릿 비스킷 따위는 꺼내먹고

나침반만 그대로 두었다, 하나뿐인 지구 밖으로

은신할 순 없으므로,

험한 일 닥치더라도 생존의 무거움 털고

가벼워지는 희망의 향방은 가늠하며 살고 싶어 (부분)

시인의 후배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생존배낭을 보내왔다. 하지만 시인은 “편리와 속도와 효율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저 배낭을 메도 “어디로 은신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생존배낭 속 먹을거리를 다 먹어 없애지만, 나침반은 남겨 놓는다. 나침반이 아직 “희망의 향방”을 가리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간의 폐허로부터 구해줄 동아줄”을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